[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30>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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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지금 우리 한나라는 제 앞도 가리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 어떻게 한신이 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원하는 대로 그를 제왕(齊王)으로 삼고 잘 대접하여 스스로 제나라를 지키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한왕 유방의 무서운 정치적 순발력이 일순간에 다시 빛을 뿜었다. 진평과 장량의 뜻을 퍼뜩 알아차린 한왕이 낯빛도 하나 변하지 않고 이어서 한신의 사자를 꾸짖었다.

“거기다가 우리 한나라의 대장군이요 조나라의 상국으로서 기상이 그게 무엇이냐? 대장부가 왕을 하면 진왕(眞王)이 될 뿐, 가왕(假王)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 가서 대장군에게 일러라. 과인은 제나라에 진왕 한신을 세울 수는 있어도 가왕 한신은 모른다고. 이미 장이(張耳)도 조왕(趙王)으로 세웠거늘 믿고 아끼는 대장군을 어찌 제나라의 가왕으로 세우겠느냐고.”

그리고는 장량을 돌아보며 능청스레 말했다.

“자방은 과인을 위해 제나라를 좀 다녀 오셔야겠소. 제왕의 옥새와 부절(符節) 의장(儀仗)이 갖춰지는 대로 임치로 가서 대장군 한신을 제왕으로 세우고 오시오.”

그 말을 듣자 한신의 사자는 처음 한왕이 성낸 것도 한신에 대한 호의로만 이해했다. 제나라로 돌아가 한신에게 자신이 이해한 대로 전하니 한신뿐만 아니라 함께 듣는 사람 모두가 한왕의 너그러움에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다만 한 사람 괴철만이 싸늘한 미소로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래잖아 정월이 다 가고 봄 2월이 되었다. 제왕의 옥새를 새기고 왕실에 쓰이는 부절과 의장이 갖춰지자 한왕은 장량을 제나라로 보내 한신을 왕으로 올려 세웠다. 한왕의 그림자 같은 장량이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 명의 시중꾼을 딸리고 임치까지 와서 의례(儀禮)를 주관하니, 한신의 즉위는 그 누구보다 격식과 위의를 갖춘 것이 되었다.

한왕이 장량을 보내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실은 한신이 제나라에서 거둔 승리 덕분이었다. 그 사이 패왕 항우에게도 용저가 유수의 싸움에서 한신에게 죽고 이끌고 간 군사들마저 한 사람도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곧 그 소문은 몹쓸 전염병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재빠르게 초나라 진중을 돌아 아래위를 가릴 것 없이 모두를 두려워 떨게 했다. 장량 일행이 아무 일 없이 광무산을 빠져 나가 제나라로 갈 수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그 뒤로 한동안 광무산의 한군 진채가 평온했던 것도 실은 그래서 초군의 기세가 한껏 움츠러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장량은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의례를 치러 한신에게 한왕의 고단함과 군색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사신으로서 오직 한왕의 여유와 너그러움만을 보여주다가 며칠 뒤에야 가만히 한신을 찾아보고 새삼스러운 하례(賀禮)와 함께 말했다.

“신이 떠나올 때 우리 대왕께서는 제왕께서 앞으로 초나라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매우 궁금해 하셨습니다. 항왕이 대군을 이끌고 멀리 광무산에 자리 잡은 지 벌써 몇 달, 초나라에서는 군량과 군사만 긁어와 지금 그곳은 속빈 강정처럼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제왕께서는 언제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치고 항왕이 돌아갈 길을 끊으시겠습니까?

겉으로는 조심스레 묻고 있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나무람 섞인 재촉 같기도 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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