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李哲이 사는 길

  • 입력 2005년 6월 30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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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새 야당(신한민주당)의 돌풍을 몰고 온 두 주역은 DJ(김대중) YS(김영삼)였지만 화제의 초점은 서울 성북에서 출마해 당선된 서른일곱의 이철(李哲)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의 선거 벽보에는 ‘정치 사형수 이철’이라는 굵은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5년 6월 이 씨는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됐다. 지난 월요일 아침 필자와 만난 그는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보은(報恩) 인사’라며 제가 대통령에게서 엄청난 은혜라도 입은 것처럼 말하는 것은 좀 그러네요. 철도공사는 공기업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곳입니다. 노조는 강하고, 재정 상태는 부실덩어리고, 대민(對民) 서비스와 직결돼 바람 타기 십상이고. (지난해 총선 때) 부산에서 진 거야 그것대로 명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잘못하면 뭐가 남겠습니까. 속된 말로 ‘피박’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피박’ 쓸 위험이 있는 자리라면 안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라고 물으려는데 그가 앞서 “어렵다고 피하지는 말자, 여기서 지면 끝이라는 각오로 한번 해보자, 그렇게 결심을 했지요”라고 말했다.

공기업 사장자리는 공모(公募)가 원칙으로 돼 있다. 한데 그의 말은 낙점(落點)에 가깝게 들린다. 하기야 청와대의 인사수석은 “배려 케이스라고 해도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이 제 인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이 씨를 ‘배려’ 했고, 이 씨는 ‘피박’ 쓸 각오로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정치인 노무현과 이철은 대세보다는 나름의 명분과 원칙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코드’가 맞았다. 1990년 YS가 3당 합당으로 여권에 합류하자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잔류했다. 1995년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도 따라가지 않고 ‘통추’를 만들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두 사람의 진로는 갈렸다. 노무현은 김원기 등과 DJ에게로 가고, 이철은 제정구 등과 ‘조순의 한나라당’으로 갔다.

12대부터 14대까지 내리 3선을 하며 잘나가던 이철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점차 정치판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1997년 대선 후에는 정계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다시 정계에 얼굴을 내비친 것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하면서.

“당시 노 후보 측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어요. 정 후보 측에서 도와달라고 해 참여했지요. 그러나 곧 판단의 실수라는 걸 깨닫고 후보단일화에 앞장섰습니다.”

선거 전날 후보단일화가 깨지자 그는 즉각 정몽준을 떠나 노무현에게로 갔고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해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갑에 출마했다가 한나라당 정형근 후보에게 패했다.

노 대통령은 그렇게 이 씨에게 신세를 졌고 철도공사 사장 자리로 신세를 갚은 셈이다. 물론 공기업 사장을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와대 측 말대로 전문성보다 통합의 능력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지난날 전문가들이 경영했다는 철도공사가 어땠습니까. 1년에 1조 원 이상 적자를 내면서도 7∼8년 후에는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는 허위 보고를 일삼아 왔습니다. 정부도 대책 없이 그럭저럭 넘어갔고요. 이제 이걸 깨야 합니다. 그런 일은 과거의 잘못과 인과(因果)관계가 없는 저 같은 비전문가가 오히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조의 의견을 존중하기는 하겠지만 이면합의 같은 술수는 결코 부리지 않을 겁니다.”

공기업 사장으로 변신한 정치인 이철은 이제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그가 철도공사 사장자리를 정치 복귀를 위한 경력 관리 코스쯤으로 여기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낙하산 인사’의 성공 케이스를 보고 싶다. 30년 전 민주화의 열정을 이제 구체적인 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정치 사형수 이철’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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