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의 거장들]<2>中‘붉은 수수밭’ 작가 모옌

  • 입력 2005년 4월 17일 18시 46분


코멘트
베이징의 프렌드십 호텔 로비에 선 모옌(오른쪽)과 필자 박명애 씨. 모옌은 “산둥 성 황토에서 자란 내 유년기는 궁핍했지만 아름다웠다. 비 내리고 난 뒤에는 말발굽만 한 커다란 두꺼비들이 집 앞에 나타나곤 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박명애 씨
베이징의 프렌드십 호텔 로비에 선 모옌(오른쪽)과 필자 박명애 씨. 모옌은 “산둥 성 황토에서 자란 내 유년기는 궁핍했지만 아름다웠다. 비 내리고 난 뒤에는 말발굽만 한 커다란 두꺼비들이 집 앞에 나타나곤 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박명애 씨
모옌(莫言)은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의 원작자다. 올해 만 쉰 살이 된 그는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모옌은 글자 그대로 ‘말이 없다’는 필명이다. 실제 그를 만나 보면 과묵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는 굴레를 벗은 말(馬)이 된다. ‘붉은 수수밭’이 그랬듯이 작품들의 배경은 거의 그의 고향인 산둥(山東) 성 가오미(高密) 현 둥베이(東北)이다. 고향에서 자기 문학의 밑거름을 얻어온 그는 자택이 있는 베이징을 떠나 지금도 새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고향에 가 있다. 모옌은 고향의 척박한 땅에서 벌어진 중국 근현대사에 천부적인 상상력을 가미해 소설로 재생산해 왔다. 내가 그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묻자 그는 고향 이야기를 꺼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저에게 고향은 지긋지긋한 곳이었죠. 옷이 없는 여름이면 맨 살갗이 타서 새카맣게 되고, 겨울이면 바들바들 떨면서 자랐습니다. 1976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남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저는 날아갈 듯 기쁘더군요.”

그렇지만 그는 결국 고향이 자기 작품의 모태이자 젖줄이라는 걸 인민해방군에 들어가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저는 군대 들어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주인공을 도시 사람처럼 만들어보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더군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수수밭 콩밭 목화밭 같은 것이었죠. 결국 다시 고향 땅을 밟았을 때 먼지를 뒤집어쓴 밀 이삭조차 예뻐 보이더군요. 결국 처참했던 저의 유년시절과 고향은 제 작품의 인물이 되고, 상상력의 보고가 된 것입니다.”

모옌은 1981년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를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 풍경이 있다. 혹독한 가뭄 또는 극심한 홍수,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자 눈앞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친자식을 고깃덩이처럼 팔아버리는 아비 어미의 모습이다. 아, 이렇게 잔인한 것이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생생하게 그려진 이런 장면을 읽고 나면 모옌은 천재성이 농후한 이야기꾼이자 천부적인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또한 그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란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가령 가난에 지쳐 자식을 팔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낙천적인 인간 군상들(작품 ‘술 나라’),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명령을 받고 인간 살점을 구백구십구 조각으로 베어내는 망나니(작품 ‘탄샹싱’), 평생 여자들의 젖가슴을 찾다가 끝내는 정신병원까지 다녀오는 금동(작품 ‘풍유비둔’)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렇다. 모옌은 열강이 만든 근대사의 그늘 아래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려왔던 대륙의 시뻘건 생명력을 생생하게 그려낸 세계적인 작가다. 바로 극단까지 간 갖가지 인간의 운명과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1990년대 들어와 장편소설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썼으며, 질그릇 같은 문체로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즐겨 다뤘다. 장편 ‘술 나라’가 그런 이야기다. 실제 ‘술고래’인 모옌은 이 작품이 “내 대표작”이라고 했다. 한 광산촌에서 아이들을 잡아먹는 일들이 벌어지자 수사관이 파견되는데, 이 수사관마저 술독에 빠져버리는 희화화한 이야기다.

‘술 나라’를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술독에 빠진 상태로 세상을 보면 진리라는 것 자체가 가장 위선이며, 선이라는 것 자체가 악의 일부분이고, 먹고 먹히는 세상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생각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소설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소설에는 언어도 있고, 이야기성도 있고, 구조도 있습니다. 하지만 뭐가 없는지 아십니까? ‘신비한 그 무엇’이 없습니다. 소설은 허구적인 신비를 노래하는 것이거든요. 소설가가 언어와 이야기, 구조를 다 장악한다고 해서 위대한 작품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제가 고향을 제 서사구조에 끊임없이 삽입하는 것도 이 세 가지 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죠. 고향에는 신화의 세계가 있고,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가 있지요.”

그는 새 작품 구상이 끝나는 4월 말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을 거란다. 그는 고향의 자기 집을 ‘창고’라고 부른다. 실제 창고를 개조했다. 그 창고에서 바람 소리, 밀밭 향기, 검붉은 태양이 일렁이는 새 작품이 또 탄생하기를 기원해 본다.

상하이=박명애·번역문학가·소설가

동아일보

● 모옌은…

△1955년 중국 산둥 성 가오미 현에서 출생

△1981년 격월간 ‘롄츠(蓮池)’에 처녀 단편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 발표

△1984년 중편 ‘투명한 홍당무’ 발표

△1986년 ‘인민문학’ 지에 중편 ‘붉은 수수밭’ 발표

△1988년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

△1989년 소설 ‘백구 그네 대’로 대만 롄허보도상 수상

△1993년 장편 ‘술 나라’ 발표

△2001년 장편 ‘탄샹싱(檀香刑)’ 발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