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룩앳미’…“날 좀 봐주세요 제발!”

  • 입력 2004년 12월 16일 15시 57분


코멘트
사진제공 스폰지
사진제공 스폰지

“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선 좋은 소리를 낼 수 없어.”

잔뜩 긴장한 채 노래하는 롤리타에게 성악선생님 실비아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 노래만 그런가. 대화도 그렇다. 하고 싶은 말보다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을 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 법. 그러나 내 귀에 가장 크게 증폭되는 것은 언제나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목소리, 혹은 내가 듣고 싶은 소리다.

24일 개봉되는 영화 ‘룩 앳 미(Look at me)’는 ‘그렇다면 진정한 대화는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연극배우 지망생이었다가 지금은 성악 공부 중인 스무 살의 뚱보 아가씨, 롤리타(마릴루 베리). 그녀는 아버지에 따르면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는 애”다. 하지만 그녀가 매사에 뚱한 표정을 짓게 되는 원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 “늘 남에게 질문만 하지, 대답을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인 아버지 에티엔(장 피에르 바크리)은 이기적인 독설가이지만 유명작가이자 편집자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사람들을 발밑에 거느린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아니라 아빠에 관심 있는 거지’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롤리타가 예외적으로 우러러보는 인물은 성악선생님 실비아(아네스 자우이). 그러나 실비아 자신은 두 권의 책을 낸 뒤 흥행이 신통찮아 실의에 빠진 작가 남편 피에르(로랑 그레빌)를 위로하랴, 생업인 레슨 일정을 쫓아다니랴 늘 허둥댄다.

두 가족의 삶은 피에르의 세 번째 책이 일약 평단의 주목을 얻으면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다. 에티엔은 피에르의 다음 책을 자신의 출판사에서 내기 위해 실비아와 피에르 부부에게 호의를 베풀고, 실비아는 귀찮게 여기던 학생 롤리타가 에티엔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롤리타와 친구들이 준비하는 성악발표회 레슨에 돌연 관심을 쏟는다. 한편 하루아침에 TV 쇼에 초대받는 명사가 된 피에르는 슬슬 무명시절의 친구들을 지겨워하기 시작하는데….

피에르가 낸 세 번째 책의 제목이자 영화의 제목인 ‘룩 앳 미(원제 Comme une Image)’는 “제발 날 좀 봐. 날 사랑해줘”라는 등장인물 각각의 호소를 담고 있다. 롤리타가 누구보다도 자신을 보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아버지다. 무명작가 피에르가 간절히 원하는 건 자신이 경멸하는 대중의 눈길. 잘난 에티엔조차 재혼한 아내가 자신의 독선을 못 견디고 떠나자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였는데…. 이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며 티슈로 눈물 콧물을 닦아낸다.

영화 속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 의사가 관철되는 방법은 오로지 ‘권력’을 통해서다. 첫 장면에서 차의 라디오 볼륨을 한껏 높이고는 “싫으면 딴 차 타”라고 승객인 롤리타를 윽박지르는 택시기사처럼 상대를 위협하거나, 에티엔처럼 사회적 지위로 상대를 누르거나, 그도 아니면 “아이스크림 줘”라고 온 집안이 떠나가게 울어대는 롤리타의 어린 여동생처럼 막무가내로 뻗대거나….

등장인물 저마다 내지르는 “내 말 좀 들어. 입 닥치고 날 좀 보라고”라는 투덜거림으로 소란하던 영화는, 슈베르트 모차르트 헨델의 노래들이 울려 퍼지며 비로소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롤리타가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An die Musik)’의 가사, ‘천상의 음악이여. 인생의 광폭한 품에서 숨 막힐 때마다 그대는 내 마음에 안식을 주고…’ 그대로다. 말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노래이며, 노래는 들어주는 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질적인 사람들 간의 소통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첫 연출작 ‘타인의 취향’(2001년)으로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던 재능 많은 프랑스 여성감독이자 배우, 시나리오 작가 아네스 자우이. 이번 작품에서는 그 문제의식을 ‘스무 살의 불만 많은 뚱뚱이 아가씨’라는 캐릭터와 클래식 음악에 실어 보다 경쾌하고 젊은 프랑스식 수다로 풀어냈다. 주연 마릴루 베리는 프랑스 여배우 조지안 발라스코의 딸로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올해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