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하루가 짧다” 호텔리어 24시 밀착 취재

  • 입력 2004년 6월 3일 1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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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특급호텔에는 하루 수백명의 사람이 드나든다. 고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호텔리어들은 24시간 바쁘게 움직인다. 사진은 서울 프라자호텔.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서울의 특급호텔에는 하루 수백명의 사람이 드나든다. 고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호텔리어들은 24시간 바쁘게 움직인다. 사진은 서울 프라자호텔.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오전 7시반. 일반 직장인이라면 출근 준비가 한창일 이 시간에 서울 프라자호텔 노순기 객실영업팀장은 사무실에 도착해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지난밤에 호텔에서 벌어진 상황을 체크하고 당일 호텔을 찾을 VIP가 누구인지 살핀다.

이 호텔에서만 24년째인 그는 “하루 300∼400명의 손님이 투숙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노 팀장 같은 호텔리어는 최근 젊은이들이 가장 동경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 겉으로 드러나는 호텔의 모습은 늘 차분하고 평화롭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전투 상황이다. 서울 시내 특급호텔의 하루를 살펴봤다.

○ 정치인-재계인사 등 수시출입 긴장

호텔은 24시간, 1년 365일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이다. 먹고 자는 서비스를 생산하는 라인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이 공장의 근로자들은 보통 8시간 단위로 오전, 오후, 야근 3교대로 근무한다. 한 달 단위로 근무 일정이 적힌 일정표가 작성되기 때문에 일반 직장인처럼 공휴일이나 일요일을 찾아 쉬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프런트 데스크는 체크아웃이 몰리는 오전 8∼9시반, 오전 11시∼낮 12시와 체크인 고객이 많은 오후 4시경에 가장 바쁘게 돌아간다.

호텔에는 객실만 있는 게 아니다. 피트니스센터나 식당 같은 호텔의 부대시설은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호텔신라 설립 초기에 중심 역할을 했고 대표까지 지냈던 현명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매일 새벽 호텔신라 피트니스센터를 찾아 하루를 시작한다.

한 그룹 총수의 아들인 L씨는 계열사 호텔 대신 사무실에서 가까운 프라자 호텔의 피트니스센터에서 매일 새벽 체력 단련을 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정치인인 H씨도 같은 호텔을 이용한다. 이곳에는 얼굴을 알 만한 정, 재계 인사들이 많다.

호텔 식당 역시 유력 인사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된다. 점심식사는 거리상 강남보다는 시내에 있는 호텔을 선호하고 식당에선 늘 별실을 찾는다는 게 호텔 관계자들의 전언. 당직 지배인들은 정오와 오후 7시 무렵에는 식당을 찾는 VIP를 맞기 위해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다.

호텔에 있는 명품숍들도 평소 손님이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몇몇 핵심 고객 덕분에 늘 상당한 수준의 매출이 이뤄진다고.

○ ‘출입금지 난동꾼 손님’ 리스트 관리

호텔에는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있어서 온갖 일이 다 일어난다. 로비에 사람이 몰려 어수선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도난 사건. 특히 호텔에서 가방을 맡은 후 보관증을 써줬다가 없어지면 고스란히 물어내야 한다. 호텔 곳곳에 카메라가 달린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일부 호텔에는 객실 복도에도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모닝콜 서비스는 호텔 입장에서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정해진 시간에 깨우지 않았다간 “수백만달러가 걸려 있는 계약에 늦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지 않아 직원이 방으로 직접 올라갔을 때 문이 안에서 잠겨 있다면 둘 중에 하나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거나 아니면 진짜 ‘사건’이 발생한 경우. 호텔 직원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 방에 아무도 없으면 욕실 문을 열게 되는데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고 말한다.

몇해 전 방영된 TV 드라마 ‘호텔리어’에는 악당들이 작정을 하고 호텔 식당에서 강짜를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일이 터지면 호텔은 일방적으로 당한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 객실 값을 깎거나 식당을 공짜로 이용하는 손님도 종종 있다.

행패가 몇 차례 이어지면 호텔에선 임원 명의로 정중하게 “다시 이용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낸다.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거나 직원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반복돼 출입금지 처분을 받은 손님이 호텔마다 꽤 있다.

○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

국내 비즈니스호텔의 고객은 90% 정도가 외국인. 예약을 하지 않고 와서 방을 달라고 하는 고객을 ‘워크 인’이라고 부르는데 특급호텔에는 하루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 하지만 호텔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유흥가에서 가까운 서울 강남의 모 호텔은 한창때 수십개 객실이 이런 고객으로 찼다고 한다.

요즘처럼 호텔끼리 경쟁이 치열할 때는 한 번 방문한 고객을 다시 끌어들이는 게 가장 큰 관심사다. 이 때문에 호텔에선 고객의 정보를 일일이 입력하고 두 번째 방문부터는 집에 온 것 같은 맞춤 서비스를 하려고 노력한다.

한 특급호텔 고객의 신상카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월○일 투숙. 시바스 리갈 위스키를 물과 함께 마심. 물은 S샘물. 베개를 딱딱한 것으로 교체. 금연실을 요청했으나 줄담배. 특히 D담배를 즐겨 피움. 일본 스포츠 신문을 달라고 함….’

리츠칼튼호텔의 GRO(Guest Relations Officer)인 배미용 대리는 “비행기 도착 시간을 알면 공항 상주 직원이 고객을 정중하게 영접한 후 사진을 찍어 호텔로 전송한다”고 소개했다. 호텔에 도착한 후 벨맨이나 프런트 직원이 고객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세심한 서비스 덕분에 이 호텔은 투숙객 가운데 40%가량이 재방문 고객이다.

호텔 객실이 얼마나 차느냐는 유력한 경기 선행 지표 가운데 하나. 국내 기업이나 금융기관과 투자 상담을 하러 한국에 오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증감 추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호텔의 성수기’라는 요즘 서울 시내 특급호텔의 객실 이용률은 70% 선이다. 지난해 이맘때는 90%였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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