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日서 패션쇼 가진 디자이너 배영진씨

  • 입력 2004년 6월 17일 21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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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천연 소재를 사용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배영진씨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자신의 매장 겸 작업실에서 옷을 손질하고 있다. 그의 옷은 한국 전통 요소를 모던하게 풀어낸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한국의 천연 소재를 사용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배영진씨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자신의 매장 겸 작업실에서 옷을 손질하고 있다. 그의 옷은 한국 전통 요소를 모던하게 풀어낸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일본 황실 등 최상류층이 휴가를 즐기는 여름 휴양지 나스 고원. 그 숲 속에 있는 최고급 리조트 호텔 니키 클럽.

12일 오후 이곳에 단아하고 품격 있는 차림의 손님 200여명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일본 전통 가옥 형태로 지어진 호텔 본관 앞좌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연못 속에는 조그만 자갈들이 정갈한 물빛을 머금고 있었다.

명주, 모시 등 한국의 천연 소재를 활용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배영진씨(48·꼬세르 대표)의 패션쇼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실크의 속삭임-배영진의 미(美) 세계’는 이렇게 시작됐다.》

○ 일본에서 열린 패션쇼

여느 패션쇼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한국 무용가와 비올라 연주자가 각각 배씨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쳤다. 춤은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이었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 ‘천사의 협주곡’ 등이 흘러나오면서 모델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12일 일본 나스 니키클럽에서 열린 배영진씨의 패션쇼(오른쪽). 톱 모델 장윤주가 피날레 때 입은 검은색 공단 이브닝드레스는 단아하면서도 화려하다. 사진제공 꼬세르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을 익히지 않은 생명주를 사용해 겹겹이 주름을 잡은 이브닝드레스에는 옛날 베갯모에서 따온 들꽃 문양 자수가 곱게 들어 있었다. 청, 적, 황, 백, 흑 등 전통 오방색 실을 모시 위에 촘촘히 스티치한 드레스는 귀엽고 발랄했다.

흰색 실크를 한올 한올 손으로 풀거나, 목련 무늬가 들어간 빨간색 모본단을 허리 부분에 굵게 두르기도 했다. 형형색색 나비가 비상하는 형상의, 폭이 넓은 검은색 공단 드레스는 피날레를 우아하게 장식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이름이 생소한 배씨는 한국 전통 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옷으로 한국 사회 상류층과 주한 외국인 여성들을 다수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이날 패션쇼에도 한국측 인사 30여명이 자비를 들여 참석했다.

“아직도 한복은 평상시 쉽게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게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모시 명주 같은 소재나 전통 문양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서 잔잔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담백하고 소박하고 깨끗하죠. 이런 장점을 살려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는 지극히 한국적 소재를 한복 같지 않게 표현한다. 이른바 퓨전인 셈이다. 전통 한복은 평면적이지만 여기에 ‘다트’로 입체감을 불어넣어 인체에 맞도록 했다.

엉덩이를 감추기 원하는 고객을 위해서는 앞자락이 길고 뒷자락이 짧은 한복의 당의를 거꾸로 변형해 앞을 짧게, 뒤를 길게 만드는 식이다. 한복처럼 거추장스럽게 고름을 맬 필요 없이 매듭단추로 상의를 여미고, 치마는 패치코트를 입지 않아도 풍성하게 펼쳐지도록 만든다. 천연 염색한 옷은 분홍색, 노란색, 하늘색 등으로 화사하다. 한 벌 가격은 100만원대. 국내 디자이너 부티크 옷과 견주어 비싸지 않다.

○ 가장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꼬세르’라는 이름의 옷 가게를 연 것이 1996년. 동국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조각가인 남편과 함께 1980년대 후반 스페인 유학을 다녀온 뒤 수입 구두 가게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한복 바느질과 천연 염색을 배웠다. 꼬세르는 스페인어로 ‘바느질하다’란 뜻이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왕은 꼬세르에서 한참동안 옷을 구경했다. 2002년에는 세계적 패션 브랜드 에트로의 여성복 수석 디자이너 베로니카 에트로도 들러 옷을 구입했다.

이화여대 박물관 나선화 학예실장은 수년 전 유럽에서 열렸던 학술 세미나에 배씨의 옷을 입고 참석한 이후 아직도 외국 학자들로부터 ‘멋쟁이’란 소리를 듣는다. 나씨는 “한국적이면서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 주는 배영진씨가 고맙다”라고 말한다.

배씨는 말한다.

“스페인 친구들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 그들은 제게 ‘너희 나라 옷을 보여 달라’고 했죠. 개량 한복을 보여주니 ‘재미 없다’고 했고, 전통 한복을 보여주니 ‘불편하다’고 했어요. 개량 한복과 전통 한복의 틈새를 메워줄 옷이 필요하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배씨는 첫 패션쇼를 일본에서 현대적 퍼포먼스 형태로 열었다. 그것도 서양식 이브닝드레스라는 아이템을 택했다. 왜일까.

“한국 옷이 낯설고 새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없습니다. 한국적 소재를 사용하더라도 전 세계의 패션 유행 요소를 무시할 수 없죠. 빈티지 로맨티시즘이 유행하는 요즘에는 한국의 명주와 외국 리넨, 시폰을 적절히 배합하고 있습니다.”

배씨는 이번 쇼의 피날레 무대에서 비대칭으로 주름을 잡은 주황색 실크 소재 재킷에 청바지와 주황색 푸마 스니커즈를 매치한 차림으로 무대 인사를 했다. 그의 옷은 한 벌로 갖춰 입을 때 한없이 격조 있지만, 캐주얼 옷과 함께 입어도 잘 어울린다. 남성용 모시 조끼를 여성이 입어도 멋스럽다.

그의 옷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다소 진부한 경구를 새롭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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