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신지호/‘정치구도 선진화’ 아직 멀었다

  • 입력 2004년 4월 13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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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를 달성하는 것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과제라면 그를 위한 정치 구도는 어떻게 짜여야 할 것인가? 지역감정에 기초한 구태정치가 비전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 새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람직한 정책정당 구도인가? 후끈 달아오른 선거 열기와 달리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책정당으로 지역주의 극복해야 ▼

얼마 전 문성근 명계남 콤비는 열린우리당이 ‘잡탕 정당’이므로 언젠가 보수-진보로 분당해야 한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들의 발언은 분명 선거전술상의 실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실을 이야기했다. ‘한 지붕 세 가족’이라 할 만큼 지금 열린우리당의 구성은 이질적이다.

정동영 의장은 실용주의자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지만 고도 성장에 대해선 긍정적 마인드를 갖고 있다. 얼마 전 유시민 의원이 “열린우리당은 건전 보수가 주도하는 중도우파 정당”이라고 한 것은 정 의장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 여겨진다. 반면 김근태 원내대표와 노무현 대통령 측근그룹 등 민주화 세력은 개발독재의 부정적 측면에 주목한다. 그들에게서 조국 근대화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언급을 듣기란 무척 어렵다. 한편 열린우리당의 개혁 코드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관료 출신 인사들도 현재 선거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잡탕 정당’을 좀 점잖게 표현하면 ‘무지개 정당(rainbow party)’ 또는 ‘포괄 정당(catch-all party)’이 된다. 이는 미국과 같은 양당제 구도에서 각 당이 과반수 획득을 위해 이념 스펙트럼의 중앙으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좌우 정렬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지역감정으로 승부를 보던 한국 정치에 이 같은 정당이 현 시점에 필요한지는 회의적이다. 지역주의의 극복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보다 분명한 노선과 정책을 내걸어야 할 때다.

그렇다면 ‘수구냉전’ 세력이라고 비난받아 온 한나라당은 어떠한가? 부패와의 싸움, 미래지향적 자기 혁신 등을 통해 선진국형 보수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그 실험은 현재 진행 중이다. 박근혜 대표는 과거의 부정적 유산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합리적 개혁주의자로 학계의 신망을 받아 온 박세일 서울대 교수의 합류는 한나라당이 정책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실험들이 성공한다면 한나라당은 21세기형 보수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감안할 때 성공 여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보야당론을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은 어떠한가? 이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사라져야 할 정당이며 보수-진보의 자리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먼저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진보정당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적 소유의 제한’, ‘생산 수단의 사회화’, ‘시장 조절보다 사회적 조절(계획)을 우위에 둔 경제 운영’이라는 그들의 강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포스트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신사회운동과 유럽 사민주의의 경험을 참고해 합리적 진보로 거듭나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바람직한 보혁구도’ 위해 고민을 ▼

이처럼 바람직한 보혁구도의 형성은 아직 이른 것 같다. 선진화시대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할 정당이 나오려면 기존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모두 20세기의 ‘촌티’를 벗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단행해야 한다. 그나마 한나라당은 연이은 대선 패배로 그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으나, 열린우리당은 문제의식 자체가 희박하다. 그들은 아직도 ‘정의의 사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자기 혁신의 필요에 직면할 것이다.

한국이 쉬더라도 세계는 바삐 돌아가고 있다. 이제 선진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안목 있는 유권자들은 내일 나라의 선진화를 향한 씨를 뿌리기 위해 투표장에 나가야 한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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