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22>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4월 9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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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20萬을 산 채 묻고 ④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곡관이 300리 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제는 귀찮은 짐을 부려 놓을 때입니다. 믿지도 못하는 대군을 등 뒤로 거느리고 관중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장군(上將軍)께서 밝게 보신 대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부모처자가 있는 땅으로 돌아간 뒤, 저들이 창칼을 거꾸로 돌려 우리에게 덤빈다면 우리는 등과 배로 강한 적을 맞는 꼴이 나고 맙니다.”

경포(경布)가 그런 말로 항우를 편들었다. 그러자 포(蒲)장군도 굳이 항우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입을 다물어 따르겠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럼 당장 우리 장졸들을 깨워 저들을 쓸어버리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 30만이 모두 나서면 무기도 없는 저들 20만을 죽여 없애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뜻이 대강 하나로 모아지자 항우가 다시 성급을 드러냈다. 그때 경포가 신중함으로 나잇 값을 했다.

“오늘밤은 저들의 움막이 여기저기 흩어진데다 우리 군사들의 군막도 뒤섞여 있어 일이 어렵겠습니다. 우리 군사들을 저들 몰래 가만히 모으기도 힘들거니와, 용케 그리해도 저들이 흩어져 있어 한꺼번에 모두 쓸어버릴 수 없으니 내일 밤으로 미루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놓고 다시 덧붙였다.

“아무리 우리 군사들의 머릿수가 많고 창칼도 우리 쪽만 있다지만 저들도 만만찮은 대군입니다. 먼저 저들을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다 몰아두고 우리 전군을 들어 벼락같이 들이쳐야 일을 깨끗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항우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말했다.

“내 이 부근에서 싸움이 있을까 하여 지형을 둘러보았더니 여기서 남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에 묘한 골짜기가 하나 있었소. 작은 언덕 사이로 난 골짜기인데 그 끝은 높이 열 길이 넘는 진흙 벼랑이라 짐승 떼를 몰아 사냥하기 좋은 곳이었소. 싸움에서는 적을 그 골짜기로 꾀어들어 돌아갈 길을 막고 세차게 몰아붙이면 모조리 그 골짜기 끝 벼랑 아래로 떨어뜨려 죽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떻소? 이제 그 골짜기를 한번 써보지 않겠소?”

“어떻게 쓰시렵니까?”

“내일 진졸(秦卒)들의 움막을 모두 그 골짜기 입구로 옮기게 하시오. 우리 군사들의 군막은 따로 그 바깥을 둘러싸듯 몰아서 세워 두었다가, 내일 밤 삼경이 되면 모두 깨워 일시에 진졸들의 움막을 들이치도록 합시다. 땔나무로 화공(火攻)을 곁들이면 저들은 하나도 빠져 나오지 못하고 모조리 그 골짜기 끝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 것이오. 그런 다음 우리 군사를 모두 풀어 그 진흙 벼랑을 헐어버린다면, 20만 가까운 저들의 주검을 따로 묻는 번거로움을 면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일을 말 많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출 수도 있을 것이오.”

20만의 목숨을 앗는 일이었지만 항우는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거느린 장졸이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먹던 밥을 나눠줄 만큼 자애로운 장수와는 너무도 다른 일면이었다.

글 이문열 그림 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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