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 기자의 반집&한집]白잡고 끙끙… 黑잡더니 펄펄

  • 입력 2004년 3월 12일 19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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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광주 무등파크호텔에서 열린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1국.

이창호 9단은 허리를 펴고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쳐 놓은 채 반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은 바둑판 위가 아니었다.

“10초 남았습니다. 하나 둘 셋….”

계시원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그는 흠칫 놀라며 백돌을 내려놓았다.

2, 3집짜리 끝내기만 남은 상황에서 흑을 든 목진석 7단이 반면 10집을 앞섰다. 뒤집어 질 곳이 없다.

끝내기를 하는 이 9단의 표정에선 ‘왜 이렇게 됐을까’하는 서글픔이 풍겼다.

이 9단은 대국전 돌을 가려 백이 나왔을 때부터 불길한 느낌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가 국수전과 기성전 도전기에서 최철한 7단과 7번 싸워 3승 4패. 백을 잡았을 때마다 졌다.

목 7단은 예상대로 처음부터 몸싸움을 시도했다. 거리를 두고 주먹이 오가는 게 아니라 몸을 바짝 붙여 힘겨루기를 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에서는 수읽기만 승패를 좌우한다. 이 9단이 이런 싸움을 마다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관전자들의 속이 탈만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 하지만 이 9단은 국수전 등에서 최 7단의 화살을 맞은 채 하기는 사슴이었고 목 7단은 최 7단이 닦아놓은 지름길로 달려오는 사냥꾼이었다.

장면 1도 백 1. 이 9단은 대마가 물고 물리는 우변에서 빠져나와 좌하귀 큰 곳을 차지했다. 둔하지만 힘차게 ‘A’로 뻗어두는 수가 이 9단의 평소 모습인데 실리에서 앞서가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에 서두른 것. 국수전과 기성전에서 최 7단에게 그랬듯 ‘돌부처’의 평정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 1로 인해 흑은 2로 좌상귀 백 한 점을 공격하며 기선을 잡았고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시작했다.

이틀 뒤 같은 장소에서 열린 2국. 흑을 잡은 이 9단은 초반 실리에서 크게 앞서자 평소 ‘돌부처’의 면모를 되찾았다. 불리한 백이 우상귀에서 패를 유도하자 이 9단은 장면 2도 흑 1로 이었다. 이 9단다운 침착한 수. 백의 술수에 휘말리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2국에서 쾌승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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