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 기자의 이 한수]강적 앞의 초단, 자기 덫에 걸리다

  • 입력 2007년 10월 1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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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훈(사진) 초단은 대국이 끝난 뒤 복기하는 자리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세돌 9단이 하는 말에 그는 가끔 긍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다. 그러나 자기 의견을 내비치거나 상대의 수읽기를 반박하지 않았다. 마치 스승에게 지도를 받는 제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5일 열린 국수전 도전자결정전 1국.

최 초단으로선 난생 처음으로 팬들의 주목을 받는 바둑을 두게 됐다. 그는 초단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한상훈 박정환 초단 등이 세계대회에 진출하는 등 초단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는 한 걸음 뒤처진 존재였다. 스스로도 “같은 초단진에서 내가 실력이 한 수 뒤진다”며 “형세 판단이 특히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국수전에선 달랐다. 그는 전신(戰神) 조훈현, 세계대회인 후지쓰배 우승자 박정상 9단, 국수전에 유달리 강한 이희성 7단을 잇달아 물리치고 올라왔다.

그는 국수전만 성적이 좋다는 세간의 평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 9단과의 대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돌을 가려 흑을 잡게 된 최 초단은 가벼운 안도감을 느꼈다. 흑을 잡으면 먼저 두기 때문에 미리 구상해 온 작전을 펼치기가 쉬워진다. 이 9단이 비교적 취약한 대목이 포석이기 때문에 일단 포석에서 우위를 점해야 후반에 이 9단의 막강한 공격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초반 포석은 유리하게 끌고 나갔다. 두터움을 겸비하면서도 실리에 뒤처지지 않는 포석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우변 처리가 좋지 않아 다시 형세는 원점.

최 초단은 강한 상대보다 내가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면도 백 ○로 날아올랐을 때 최 초단은 갈증을 느꼈다. 그도 이곳이 승부의 기로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 정상적이라면 흑은 장면도 2의 곳에 놓아야 한다. 최 초단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불쑥 흑 1을 두고 있었다. 백이 젖혀 잇는 것과 비교해서 실리로 엄청나게 큰 곳이라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혹시 백이 후수로 받아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으면서.

그러나 이 9단의 승부 호흡은 최 초단의 기대에 어긋났다. 노련한 이 9단은 국면의 급소가 백 2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정확히 그곳을 가격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와 막상 돌이 놓일 때의 느낌이 다르다. 백 2가 놓이자 최 초단은 아득함을 느낀다. 아무리 봐도 탈출로가 없는 것.

백 2를 뚫어져라 보면서 최 초단은 자책에 자책을 거듭한다. 몰라서 당한 것이 아니라 알고서도 당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바둑을 두겠다고 다짐했건만 스스로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90여 수 이상 더 뒀지만 패배가 자기 몫인 줄 알고 있었다.

최 초단은 승패를 떠나 이토록 허무하게 지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그가 복기 때 말이 없었던 것도 아픔을 삭이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전자 결정전 2국에선 진정한 나의 바둑을 두겠다고 되새기면서.

국수전 도전자결정전 1국(10월5일)

○ 이세돌 9단 ● 최기훈 초단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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