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정찬주/잘 커준 감나무야, 나도 고맙다

  • 입력 2003년 10월 17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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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으로 가다가도 밭머리에 선 감나무를 보면 걸음이 멈추어진다. 감이 어찌나 많이 열렸는지 잔가지들이 일제히 땅 쪽으로 휘어져 있다. 생가지가 찢어질까 봐 버팀대를 했지만 역부족이다. 맨 끝의 잔가지들은 아예 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산골 아낙네가 머리를 푼 것처럼 땅에 닿아 있다.

내 산중 처소를 찾은 어떤 손님은 감나무가 인사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감나무가 내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그런지도 모른다. 원래 감나무 주변은 가시덤불 천지였는데 내가 낫과 괭이로 말끔하게 정리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감나무 둘레를 손봐준 첫 해부터 감이 주렁주렁 열렸던 것은 아니다. 작년에 이어 올 봄에도 잘 썩힌 퇴비를 듬뿍 묻어 주었더니 풍작의 감나무가 된 것이다. 감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튼튼하게 돌봐준 내게 보은(報恩)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손에 흙을 묻혀 보면 땅과 식물이 정직하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외로운 산중에 내 육신과 혼을 씨감자처럼 묻고 산다.

지금 내가 할 작업은 벌어진 배추 잎을 짚으로 묶는 일이다. 배추 속을 통통하게 불리려면 지금 묶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추 잎들이 겉이나 속이나 제멋대로 자라나 속이 차지 않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 질서라는 끈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않으면 나날이 성숙해져야 할 내면이 얕아지거나 부실해지고 만다.

짚은 오늘 아침에 산책 삼아 서원터 쪽으로 나갔다가 부산댁 논에서 얻어온 것이다. 우선 한 단을 들고 왔다. 당장은 배추 잎을 묶는데 한 단이 들 것이고, 겨울을 나려면 적어도 다섯 단 정도는 더 필요할 것이다. 한겨울에 가스를 얼리지 않으려면 가스통을 두르는 데 두 단이 들고, 나머지는 추위를 잘 타는 동백나무 밑동을 싸주고 파초 그루터기를 덮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농부들에게는 요즘이 가장 바쁜 때다. 벼는 물론이고 콩이나 고구마도 거두는 적기가 있어서다. 다행히 나는 논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그런 대로 한가한 편이다. 더덕과 도라지는 심은 지 2년을 넘기는 내년에, 콩과 땅콩 및 고구마는 무서리를 한두 번 맞힌 후 캘 예정이다.

한기(寒氣)가 밸수록 더욱더 푸르러지는 무와 배추 잎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다. 지난 초가을까지 비가 자주 내려 어린 무와 배추의 뿌리가 썩은 탓에 밭두둑에서 반쯤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살아남은 녀석들은 활기차고 씩씩하다. 어느 정도까지만 애정을 주면 돌봐주는 이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제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밭의 작물이 아닐까 싶다.

배추를 볼 때마다 아래 절 스님에게 들었던 얘기 한 토막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날 서원터 마을로 산책을 나갔는데, 낯익은 꼬부랑 할머니가 배추포기를 머리에 이고 의병 훈련 터가 있는 윗마을로 가더란다. 스님이 왜 힘들게 배추를 이고 가느냐고 묻자, 올해는 무만 심은 동생이 생각 나 목에 배추쌈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꼬부랑 할머니가 대답하더란다. ‘삼국유사’에나 나올 법한 옛 이야기를 지금도 들을 수 있는 이 산중이 얼마나 넉넉하고 훈훈한지 정복(淨福)을 다시 느낀다.

벌써 불당에 마지를 올리는 사시(巳時)가 된 모양이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외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지심귀명례란 ‘지극한 마음으로 돌아가다’란 뜻이다.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말도 된다. 문득 이 산중의 모든 식구가 말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지심귀명례 하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 써늘한 바람에도 위축되지 않고 더욱 푸르러지는 배추나 무도 그러하거니와 산자락의 나뭇잎들도 붉게 단풍 들이는 일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고 있다. 나도 함께 그리 되고 싶은 깊은 산중의 가을날이다.

:약력: 산골의 암자나 선방을 찾아다니며 보고 깨달은 바를 글로 써 왔다. 성철 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민음사), 실크로드 견문록 ‘돈황 가는 길’(김영사)과 몇 권의 암자기행문을 냈다. 현재 전남 화순군의 산중에 집을 짓고 순한 개 보현, 문수와 함께 살면서 농사를 익히고 있다.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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