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別曲]<3>지리산 기슭에 새 둥지 시인 박남준

  • 입력 2003년 9월 24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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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2년째 한적한 산방에서 홀로 살고 있는 시인 박남준씨. 앞마당에서 우는 새와 날벌레, 개울의 물고기가 모두 그의 벗이자 시작(詩作)의 원천이다. -하동=유윤종기자
만 12년째 한적한 산방에서 홀로 살고 있는 시인 박남준씨. 앞마당에서 우는 새와 날벌레, 개울의 물고기가 모두 그의 벗이자 시작(詩作)의 원천이다. -하동=유윤종기자
《누렇게 굽이치던 섬진강은 경남 하동에 이르자 푸른빛을 찾기 시작했다. 악양 정류소 옆의 슈퍼 주인은 동매마을행 버스가 40분 남았다고 말했다.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 당도하자 버스가

바로 뒤를 따라와 섰다. 지리산 기슭 끝에 다가선 마을. 시인 박남준씨(46)의 집은 그 꼭대기에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서늘한

눈빛을 가진 시인이 걸어 나와 반겨주었다.

전주 모악산방 시절의 박남준 시인. -사진제공 호미

“하던 일을 곧 마칠 테니 잠깐 기다리세요.”그는 잡초를 낫으로 걷어내고 있었다. 마당일을 마친 시인과 다구(茶具)를 놓고

마주앉았다.》

이달 초 시인은 12년 동안 이어온 전주 모악산 기슭 ‘모악산방’ 생활을 접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여름 내내 사흘에 이틀 꼴로 줄곧 내린 비가 그의 선택에 못을 박았다. 볕이 적게 드는 계곡의 눅눅함에 질렸던 탓이다.

“여긴 빨래가 잘 말라 좋더라고요.”

산자락에 납작 엎드린 그의 집은 사진으로 봤던 예전의 ‘모악산방’과 비슷했다. 지붕 매무새가 단정해 한층 훤한 낯빛이었다.

시인은 91년 그림 그리는 지인(知人)의 소개로 전주 모악산 기슭에서 산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전주에서 일자리를 구한 지 얼마 안돼서다.

‘땔나무를 해서 불을 때고 손바닥만한 텃밭을 일구다가 나의 삶은 점차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래,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산다면 벌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산문집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벌이에 쓰는 시간을 그는 내면과 자연을 응시하는 시간으로 바꿨다. 어느 날 보니 가진 것이 된장밖에 없었다. 마당을 쓰는데 어린 쑥이 비죽이 잡혔다. ‘내 배를 채우고자, 봄볕을 기웃거리는 어린 것들을 잡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등 뒤에서 검은등뻐꾸기가 울었다. ‘흐흐흐흐어…’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며칠 뒤 손님이 찾아왔다. 또 검은등뻐꾸기가 울었다. 손님이 물었다. “저, ‘홀딱 벗고’ 하며 우는 새 이름이 뭐예요?”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당초 비우자고 마음먹었으면 내게도 홀딱 벗고로 들렸을 것을.’

텃밭을 매고, 잠자고, 할 일이 없으면 시를 썼다. 어느 때는 벗들이 놀러와 왁자지껄 떠들고 갔다. 그럴 때면 숨어있던 외로움이 고개를 내밀었다. ‘같이 내려갈 걸….’ 그렇게 고독할 때도 시를 썼다.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에 절대고독, 그 외로움 속에서 내면을 응시한 이의 언어가 올올이 담겨 있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보다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시 ‘흰 부추꽃으로’)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홀로 된 처참으로 얻어지는 외로움이 그의 시를 가능케 한다…그의 슬픔의 정조는 탈태를 위한 고통, 날개를 얻기 위한 수고로움이다’라고 평했다.

언제까지입니까, 시인에게 물었다. 이 외로움은?

“벗들도 말합니다. 그만 사람냄새 풍기는 마을로 나오지 않겠느냐고.”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그윽한 그늘을 품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을 줄 모릅니다. 귀기울여주지도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새에게, 나무에게 비위맞춰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이 다 참말은 아니었다. 미물들조차도 그에겐 마냥 편한 손님이 아니다. 그의 산문집에 실린 일화 한 토막.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운 시인의 귀에 부엉∼ 찍찍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갔다가는 마당 앞 감나무 가지에 앉아 쥐를 잡아먹는 부엉이가 놀라 날아가 버릴 텐데. 흐유 내가 이런 저런 것들에게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는 있을까….’

그렇게 여린 결을 가진 시인의 마음, 인간으로 하여 상처받을 이유는 없을 터였다. 아픔을 꿰뚫어보는 은일(隱逸)과 고독 속에서, 그의 시는 겹겹의 꽃을 피워낼 것이었다.

“내년 초 새 시집을 내려 합니다. 40대의 마지막 시집이 되겠지요. 50대에는 세상이 내게 다가서는 모습이나, 내가 세상에 다가서는 모습 모두 달라질 것입니다.”

하동=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약력 ▼

△1957년 전남 영광군 법성포 출생

△1984년 시 전문지 ‘시인’ 통해 등단

△1990년 첫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출간

△2000년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출간

△2002년 산문집 ‘꽃이 진다 꽃이 핀다’ (호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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