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삼성그룹 회장 이건희<4>

  • 입력 2003년 6월 27일 18시 41분


코멘트
《외환위기 사태 후 빅딜 협상이 한창이던 무렵. 삼성과 협상을 벌였던 한 그룹의 총수는 나중에 가슴을 쳤다고 한다.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이 이끄는 삼성 협상팀은 수정 제안들에 대해 그 자리에서 전권을 갖고 수용 여부를 최종 결정해 버리는 게 아닌가. 사소한 결정 사항조차 일일이 총수의 의견을 묻느라 우왕좌왕하는 다른 협상팀과는 경쟁력이 달랐다는 것.》

인사에서도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각 계열사가 대부분 자체 결정하도록 한다. 물론 50명에 달하는 부회장, 사장급 인사는 이 회장이 최종 결정한다. 하지만 그 중 90% 이상은 시스템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인사팀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연재물 목록▼

-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3>
-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2>
-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1>

“계열사 임원 임기가 끝날때가 다가오면 진작부터 유력한 후보가 부상합니다. 물론 실적, 고과점수 등 각종 데이터의 뒷받침을 받고 있지요. 그러면 그가 실제로 최종 선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구조조정본부 노인식 인사팀장)

이건희 회장이 2001년 1월 중국 수조우에 있는 삼성전자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회장은 중국의 추격에 맞서 첨단 기술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해 왔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아래에서 올린 인사안을 이 회장이 바꾸는 경우는 많아야 1년에 한두 건이라는 게 노 팀장의 설명. 후보가 경합할 때는 실무진에서 판단 참고용 보고서를 올린다. 그런데 이 회장의 최종 결론이 실무진의 내심과 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회장, 구조본, 계열사 경영진의 사람 보는 눈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

구조본 관계자는 “이 회장은 ‘젊은 CEO를 발탁하라’는 등 방향만 정해줄 뿐 누구를 승진시켜라, 누구는 안 된다는 등의 지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에게 “주요 인사나 정책 결정을 직접 챙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니냐”고 물었다.

“삼성에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전문경영인이 많다고 자부합니다. 각사의 경영에 대한 구체적인 의사결정은 경영자들이 자신의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고, 그렇게 하는 게 결과도 좋았습니다.”

―그래도 CEO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용병술이 있다면….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학벌이나 언변(言辯)과 관계없이 실전능력을 주로 참고하지요. 실제로 능력을 발휘해 업적을 낼 수 있는지를 중시합니다. 과거 실적과 각종 데이터를 많이 참고하지요. 그래서 주관적인 판단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시스템 구축에 노력해 왔어요.”

―인재도 CEO형이 있고, 참모형이 있다고 하는데요.

“경영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개인별로 특징과 장단점이 드러나지요. 사람을 단정적으로 ‘어느 타입’이라고 재단하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CEO가 되려면 최종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과 책임감, 사명감이 필수적입니다.”

물론 ‘시스템이 인사권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 사실이라 해도 그 시스템의 ‘완성자’는 바로 이 회장이다. 현재 삼성의 인재관리 시스템은 이 회장이 지난 25년간 꾸준히 구축해온 결과물이다. 이 회장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에 취임해 그룹 경영에 참여하면서 ‘인재 제일주의’의 콘텐츠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회장과 동갑으로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손병두(孫炳斗) 전경련 고문의 회고.

“이건희 부회장은 이병철 회장에게 ‘잡종(雜種) 강세론’을 건의했지요. 공채 출신을 우대하는 삼성의 순혈주의를 지켜가면서도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을 과감히 영입하자는 논리였어요.”

이때부터 ‘품성을 갖춘 정통 엘리트’를 중시하던 삼성의 인재관에 다양성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부회장은 세계은행의 국제금융 전문가를 초대 기획조정실장으로 영입하고, 국내외 대학에서 전문가들을 스카우트해 요직에 포진시켰다. 요즘 이 회장이 강조하는 ‘끼 있는 인재론’의 단초였던 것. 하지만 당시는 물론 지금도 ‘끼’와 ‘팀워크의 삼성’간의 함수관계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회장께서는 끼 있는 인재, 개성파 등 특이한 인재 발굴을 매우 강조하시는데, 그런 개성파들이 삼성 같은 거대한 조직에 잘 융화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신춘문예 당선자, 대학가요제 입상자, 게임전문가, 해커 등을 스카우트했는데, 적성을 살리면서 잘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조직이 이제는 특이한 사람들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개방화되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색깔의 인재들이 모여 각자의 역할을 해나가는 조직이 돼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끼’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마니아’형의 인재를 말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고르게 우수하지는 않을지라도 특정 분야에 남다른 재능과 흥미를 갖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조직 내의 협조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열정과 몰입도는 굉장히 높아요.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이 기대되는 인재 유형이지요. 이처럼 개성이 강하고 재능 있는 인력의 기를 살려주고 남다른 발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해요. 사장 전무라면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후 채용과 인사 제도에 많은 변화를 줬다. 대졸 학력 제한을 대기업 중 가장 먼저 없앴다. 신입사원들에게 가전제품을 하나씩 들려주고 팔아오라는 식의 교육도 없어졌다.

또 “윗사람만 신경 쓰는 ‘I자(字)형 인재’가 아니라, 자기 일과 관련된 여러 분야 대해 입체적으로 사고하며 옆 아래 사람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을 수 있는 ‘T자형 인재’가 되라”고 강조하면서, 인사평가에 상하·동료간 다면평가를 도입했다. 또 인사고과의 A, B, C, D등급 구분은 그대로 두되 C와 D등급간의 보너스 차등을 없앴다. 잘하는 사람을 더 줘서 격려하면 못하는 사람도 분발하니, 못하는 사람을 깎지는 말라는 지시였다. 그러면서 ‘신상필벌(信賞必罰)’ 대신 ‘신상필상(信賞必賞)’을 강조했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멧살라는 채찍으로 강하게 후려치는데 벤허는 채찍 없이도 결국 이기잖아요. 한마디로 2급 조련사와 특급 조련사의 차이입니다. 게다가 벤허는 경기 전날 밤 네 마리의 말을 어루만지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습니까.”

―인간미를 강조하면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을까요.

“인간미의 본질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방을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입니다. 무조건 부드럽고 싫은 소리를 안 하는 것이 인간미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상사가 부하의 잘못을 지적하고 지도하기 위해 꾸짖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미의 발로죠. 단 질책은 정말 그 사람을 키우기 위해 자극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해야 합니다.”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故 이병철회장 신입사원 면접 '입회' ▼

“삼성은 신입사원 면접 때 관상을 본다더라.”

고 호암 이병철(李秉喆·사진) 회장 시절에 떠돌던 풍문이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 미확인 소문은 과연 사실일까.

호암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한 대기업 CEO의 증언.

“호암이 관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호암은 한 해에 4개월가량은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이듬해 경영 구상을 했어요. 그러면 참모들이 홍콩 등지의 유명 역술가들에게 계열사 CEO 후보들의 새해 운수를 봐달라고 요청했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수많은 판단자료 중에서도 단순한 참고 사항에 불과했습니다. 운세를 본 결과를 이 회장께 직접 올리는 게 아니라 참모들이 종합보고서 식으로 만듭니다. 운세라는 게 해석의 여지가 크잖아요. 회장의 경영 구상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포인트를 줘서 보고하지요. 요즘 경영자들이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 컨설팅을 통해 확신의 근거를 얻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입니다.”

삼성의 다른 한 관계자는 “호암이 인상을 중요시했던 건 사실”이라며 “눈동자가 맑은지, 인중이 뚜렷한지, 눈을 불안하게 굴리지 않는지, 너무 손발을 움직이지 않는지 등을 관찰했다”고 전했다. 호암 자신도 “눈은 마음의 창이고 입은 진실성을 나타내며 코는 의지를 반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면접에 역술인이 동석했다는 건 낭설이라는 게 여러 사람의 증언이다.

“호암은 신입사원 면접에 꼭 참석하셨어요. 한 사람의 인재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죠. 면접장에는 인사팀장하고 부장급 여러 명이 배석하는데 당시엔 간부들 중 나이든 분이 많았어요. 아마도 처음 보는 나이든 사람이 앉아 있으니까 관상 보는 분으로 오해했을 겁니다.”

면접관들은 ABCD로 점수를 매기고 호암은 갑을병(甲乙丙)으로 점수를 냈다. 갑을 받으면 다른 면접관 점수와 관계없이 합격이고, 병은 무조건 탈락이었다. 그런데 호암은

70년대 후반부터는 “내 평가 점수도 똑같이 합산하라”고 했다. 그러다가 좀 더 지나서는 ‘사람 보는 게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진다’며 아예 면접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인재 제일주의’를 제창해 온 호암은 말년에 “사업의 승패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는데,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반반의 확률밖에는 자신이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은 인재를 감별할 때 관상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노인식 삼성 인사팀장은 전했다.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장기간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