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강영훈 前총리<上>

  • 입력 2003년 5월 11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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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8년 추석 직후. 육군본부 관리부장인 강영훈(姜英勳) 중장에게 “전방 사단의 한 경리장교가 중앙경리단 간부들에게 ‘떡값’으로 1만원, 경리단장에게는 5만원을 상납했다”는 투서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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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중장은 즉시 휘하 감사단에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대부분의 경리장교들이 투서 내용대로 ‘떡값’을 받았으나 경리단장 황인성(黃寅性) 대령만은 도리어 야단쳐 돌려보냈음이 밝혀졌다. 강 중장은 상납받은 장교들을 모두 징계조치한 뒤 황 대령을 불러 “내 밑에 귀관처럼 훌륭한 장교가 있는지 몰랐다”고 격려했다.

이후 강 전 총리는 6군단장을 거쳐 5·16 당시 육사교장을 지냈으나 박정희(朴正熙) 소장 등 군사혁명 세력에 반대함으로써 ‘반혁명’으로 몰려 예편한 뒤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가까운 친구들조차 감시의 눈길을 의식해 전화 한 통 없었다.

황 대령은 준장을 거쳐 1961년 8월 조달청장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면서도 늘 군 선배로 존경해온 강 전 장군의 처지를 가슴아파했고 한국에 남아 있던 그의 노모를 70년 작고할 때까지 정초마다 찾아가 세배를 드리는 등 아들 노릇을 대신해 주었다. 정보기관의 감시에도 개의치 않았다.

이를 계기로 마음속 깊이 가까워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서로를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 전 총리가 국무총리(88∼90년)를 지낸 지 3년 만에 역시 총리가 된 황 전 총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강 전 총리의 조언을 구하곤 했다.

다음은 강 전 총리의 회고.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터졌을 때 전북도지사를 맡고 있던 황 전 총리는 현장으로 달려가 밤낮없이 사고 수습에 매달렸어요. 그러더니 수습이 마무리되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미련 없이 물러나더군요. 철도청 사고에 도지사가 책임질 게 뭐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매사에 정직과 성실 신의를 중시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던 거지요.”

결국 인간으로서 ‘품성’을 갖춘 사람이 일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 강 전 총리의 경험이고 믿음이다.

그가 같은 맥락에서 기억하는 또 한 사람의 후배가 오명(吳明) 아주대 총장이다. 63년 여름 ‘반혁명 분자’로 몰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오명 대위입니다.”

그가 육사 교장이었을 때 생도였던 오 대위가 어학연수차 동료 장교 3명과 함께 샌타바버라에 왔다가 혼자서 ‘교장선생님’을 뵈러 왔던 것. 그 당시 분위기에서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힌 은사를 방문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았음은 다른 제자 3명이 동행하지 않은 데서도 읽을 수 있었다.

오 대위와 식사를 함께 하고 사제간의 정을 나눈 강 전 총리는 덜컹거리는 차로 제자를 샌타바버라까지 태워다주면서 ‘이처럼 당당한 인품의 젊은이들이 있다면 한국에는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오 대위는 훗날 체신부 장관을 지내면서 전국의 전화망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등 정보통신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간 됨됨이가 제대로 된 사람은 하는 일도 틀림이 없어요. 아첨과 눈치 보기에 급급한 친구들은 한때는 잘되는 것 같지만 결국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석인지관(碩人之寬·덕이 높은 사람의 너그러움)’의 도(道)를 지닌 사람이 업무에서나 대인관계에서나 의연하고 당당하게 제 몫을 해 나간다는 것, 이것이 강 전 총리가 사람을 보고 평가할 때 늘 되새긴다는 원칙이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강영훈은? ▼

노태우(盧泰愚) 정권 초반부인 88년 12월부터 90년 12월까지 국무총리를 맡아 법질서를 강조한 ‘강성 총리’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만나 보면 소탈한 느낌을 주는 외유내강형.

평북 창성 태생으로 이산가족인 그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3차례나 남측 수석대표를 맡은 경험을 바탕으로 91년부터 97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활동했다.

61년 육사 교장 시절 생도들의 5·16 지지 행진을 반대하다 ‘반혁명’으로 몰려 ‘장성 투옥 1호’를 기록하고 미국으로 쫓겨난 뒤 남캘리포니아대에서 공부를 계속해 69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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