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서울 곳곳에 숨겨진 문인들의 저택과 시비

  • 입력 2001년 4월 6일 10시 52분


◇“그곳에 시인이 살고 있었네”◇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요!

좋아하는 작가의 옛 자취를 찾는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다. 한번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소녀 시절 사랑하던 시인과 소설가들의 옛집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면 그야말로 살아 있는 문학수업이 될 터. 여행전문작가 장태동씨는 서울과 수도권 곳곳에서 숨겨진 유명 문인들의 저택, 시비 등 명소를 샅샅이 찾아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을 소개한다.

◇동료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운치 흐르는 한옥

월탄 박종화의 평창동 고택

다부지고 깐깐하게 잘 지어진 한옥 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이 있고 안쪽 깊이 ㄱ자로 이어진 본채가 앉아 있다. 바로 <금삼의 피> <세종대왕> <자고가는 저 구름아> 그리고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원작자인 월탄 박종화(1901∼1981)의 평창동 고택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즐겼던 그는 밋밋한 양옥보다 운치가 흐르는 한옥을 더 좋아했던 모양이다. 1975년 종로구 충신동에 있던 집이 도시계획에 밀려 철거 위기에 놓이자, 박종화는 그 집의 주춧돌과 기둥, 서까래 등을 가져와 그대로 복원해 지금의 평창동 집을 지었다. 그가 이 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50년대, 당시 공보부에서 세계 각처에 ‘한국의 집’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이 집을 모델로 삼으려 했을 정도로 전형적인 한옥이다. 그러나 이 집이 단순한 외형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유명해진 것만은 아니다. 아직 충신동에 있던 해방 전에는 최남선·이광수·현진건 같은 문인들이 모여들었고, 서정주·박목월·조지훈이 그 뒤를 이어 박종화의 부인이 손수 담근 동동주를 나누곤 했다. 평창동으로 옮겨오고 나서도 언제나 동료 문인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월탄은 전 생애에 걸쳐 모두 18편의 장편 역사소설을 남겼다. 그중 가장 방대한 것이 <세종대왕>. 8년 가까이 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은 그 분량만 해도 원고지 2만장이 넘는다. 그리고 이 소설을 끝으로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다. 이때 이미 그의 나이 78살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81년, 월탄은 평창동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이 집에는 아직도 그의 서재 겸 집필실이었던 조수루와 친필원고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본 총독부를 등지느라 일부러 북향으로 지은 집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만해 한용운(1879∼1944).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승려이자 시인. ‘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그의 시 <님의 침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실 그에 대한 설명은 모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식 호적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을 호적 없이 살았다는 그가 말년을 보내며 죽음을 맞이한 집이 성북동 222번지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만해는 일생 동안 전국을 떠돌기만 한 까닭에 말년에도 마땅히 안식할 집 한칸이 없었다. 이를 보다못한 주위에서 1933년 그를 위해 지어준 작은 한옥이 바로 이 심우장이다. 원래 남향으로 지으려고 했지만 당시 그 방향에 일본 총독부가 있어 이를 등지고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집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북한산 자락이 이어져 있는 동네는 다른 집이 거의 없는 절간 같은 곳이었다 한다.

말년에 만해는 중풍을 앓았다. 일제의 검열로 신문에서 그의 글이 연재를 중단당한 후 그의 생활은 비참한 지경이었고, 광복을 한해 앞둔 44년, 만해가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이유도 ‘영양실조’라 전해져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만해 사후 심우장은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연구소로 사용되었다. 84년 서울시가 지방기념물로 지정했지만, 동네 아이들이 담을 넘어 드나들고 기와지붕과 나무 기둥이 썩는 등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훼손 위기를 맞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각계에서 심우장 보수를 요청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결국 시 당국이 91년 6월 보수공사를 진행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함께 지어진 별채에는 지금 한용운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손녀딸이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인 고즈넉한 곳

상허 이태준의 수현산방

예전에 성북동에는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 한용운이 그랬고 조지훈이 그랬다. 그리고 상허 이태준(1904∼?)의 수현산방도 이곳 성북동에 있다.

작가 이태준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46년 38선을 넘어 월북한 뒤 소식이 끊긴 그의 문학은 한동안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달밤> <장마> <밤길> 같은 단편들은 88년 해금이 된 후에야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던 시절 기거하던 수현산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때가 상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 평생을 짙은 가난과 싸우며 살았던 그는 이 집에서 비로소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1930년부터 46년까지 상허 부부는 이 집에서 5남매를 낳았다.

지어질 당시에는 서남향으로 된 방이 세 개였다. 상허는 각 방에 죽향루, 문향루, 상심루라고 이름을 붙이고 작은 현판을 새겨 문 위에 걸어놓았다. 이 가운데 상심루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높다란 대청마루와 마당이 깊은 집 구조가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건물 안에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방이 두 개인 전통 한옥 구조. 집안 구석구석에 이씨의 섬세한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흔적이 될 만한 유품은 대부분 없어졌다.

낮은 울타리 밑에 심어진 단풍과 키 작은 나무들이 정감어린 이곳은 상허의 손녀뻘인 조상명(51)씨가 딸과 함께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찻집 이름도 ‘수현산방’. 오전 10시30분에 문을 열어 밤 10시30분에 닫는다.

◇천상병, 김광림 등 후배들이 뜻을 모아 세운 시비

김종삼의 광릉수목원 앞 시비

김종삼(1921∼1984)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마지막 남은 순수시인’라고 잘라 말한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절대적 로맨티스트이자 순수 그 자체의 시인, 김종삼.

그러나 그 스스로는 한번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시를 쓸 뿐이라는 것. 그의 시는 한번도 ‘시를 위한 시’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북 치는 소년>이 적혀 있는 시비가 광릉수목원 중부임업시험장 앞 수목원가든 입구에 있다. 시인이 죽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변변한 시비 하나 없자, 이를 안타까워하던 김광림·신경림·천상병 등의 후배들이 공동 예술전을 열어 모금한 돈으로 지난 93년 세운 시비다.

82년, 마지막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를 준비하며 급격히 악화된 건강으로 병원에 입원한 그는 결국 84년 12월에 숨을 거둔다. 그의 마지막 시집에는 어느 시집에나 수록하는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 등이 빠져 있다. ‘시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만한 내용을 빼달라’는 시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언젠가 딸의 소풍에 놀러 간 김종삼은, 재잘대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한켠에서 커다란 돌을 가슴에 올려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돌을 왜 가슴에 올려놓고 있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그가 한 말이다. “하늘이 너무 파랗고 기분이 좋아서 그냥 두면 몸이 하늘로 둥둥 떠올라갈 것 같아서….”

■글·황일도<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사진제공·장태동<여행전문작가, <서울문학기행>(미래M&B) 저자>

(여성동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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