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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지의 세상읽기]세계화된 조상이 필요한 시대

입력 1997-09-13 08:22업데이트 2009-09-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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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관한 어린시절의 추억은 대개 음식과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의 시장 보따리가 커졌나 하면 평소에 쓰지 않던 채반이 나오고 이내 갖가지 음식이 지글지글 포근포근 익어가는 소리, 번철에 부침질하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집안을 진동하는 것이다. 추석 전날밤의 피크는 역시 식구들이 만든 송편을 찐 솥에서 첫김이 폭폭 오를 때, 솔잎 향이 그윽한 송편을 참기름 바른 손으로 솔솔 채반에 펼쳐 놓을 때다. 솔잎 한두개가 살짝 올라붙은, 혹은 솔잎을 뗀 가느다란 자국이 나있는 쫀득쫀득한 송편, 어른들만 좋아하던 미끈미끈한 토란국, 작은 꼬치를 사용해서 신기하게 쌓아놓은 과일, 꽃봉오리로 조각한 삶은 계란, 꽃나무 가지같이 오려놓은 문어다리, 그리고 생밤의 하얀 속살…. 조상에게 드릴 음식을 미리 먹으면 입이 삐뚤어진다고 어른들이 말하는데도 우리들은 부지런히 부엌과 마당을 드나들면서 「망가진」부침개와 삶은 계란을 세우기 위해 자른 밑동 외에도 「정말 상에 놓을 것들」을 집어먹고 방에 가서 거울을 보곤 했다. 차례음식을 미리 먹지말라는 등, 음식에 혹 머리카락이 들어있으면 귀신의 눈에는 그게 뱀으로 보여 화를 내신다는 등의 말은 음식에 정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렸을 때 듣기에는 선조귀신이 꽤나 무섭고 까다롭다는 인상을 갖게 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명절이나 제사 전이면 하얀 옷을 입은 선조귀신들이 밤하늘을 훨훨 날거나, 머리를 내놓고 술술 헤엄을 치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불원천리 오시는 꿈을 꾸곤 했다. 어디 보자… 복을 줄까, 화를 내릴까… 어디 보자아 하면서…. 상 차려줄 자식이 없는 불쌍한 친구들도 거느리고 오신다하여 정식 차례상이나 제상 한쪽에 음식을 큰 그릇에 넉넉히 담아 여러벌의 수저와 함께 두었던 상도 있었다. 『대문 조금 열어놔라』 대문을 열어놓는 일을 하면서 귀신은 닫힌 문틈으로도 얼마든지 드나들고 벽도 뚫고 다니는 능력이 있는데 조상귀신을 너무 무능하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주아주 조금만 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닫힌 문으로도 얼마든지 들어오실 능력이 있다 하여도 일단 초대하는 날이니만큼 문을 열어놓는 것이 환영의 예가 아닌가하고 나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의 조상귀신들은 장손집에 왔다가 대문이 닫혀 있는 것을 종종 볼 것이고 문으로 투시하면 불켜진 차례상도 사람도 없는 빈집인 경험도 종종 할 것이다. 그 경우엔 더 좋은 곳으로 초대되신 것이다. 설악산의 콘도나 리조트… 미국 로스앤젤레스 혹은 동남아 국가의 해변 등…. 어디든 어떠리.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자손이 세계 어디서 추모하든 왜 못가리… 이런 열린 마음을 가진 세계화된 조상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어차피 여권도 비자도 노자도 필요 없고 어떤 형태의 비행기 사고로부터도 자유로운 형편인데 못가실 이유가 없다. 음식도 큰 문제는 아닌 것이, 국내의 차례상도 중국산 나물을 비롯하여 칠레산 포도, 북미 남미산 마른 생선 등 이미 국제화가 된 마당인데 원산지로 날아가서 드시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섭섭하신 점은 관광떠난 큰아들네만 찾아가다보니 작은 아들 식구들을 볼 수 없다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아이를 하나씩만 낳는 추세로 보아 앞으론 그 걱정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작은 아들도 막내 아들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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