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1958∼2011]“야구장에 꼭 돌아오겠다더니… 당신은 우리 마음속의 거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14일 21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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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올려쓴 모자… 안경 고쳐 올린뒤… 역동적 와인드업… 그 모습이 그립다

“감독 된 거 축하해줘야겠네.”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지난달 18일 친구 이만수가 SK 사령탑(감독대행)이 됐다는 소식에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그는 14일 오전 2시 2분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53세.

최 전 감독의 별세 소식에 야구 관계자와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7일 두 살 연상인 ‘영원한 3할 타자’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타계한 지 일주일 만에 야구계의 또 하나의 큰별이 졌음을 슬퍼했다. 한 누리꾼은 “하늘에서라도 장효조 선수와 멋진 승부를 하세요”라며 아쉬워했다.

고인은 롯데 시절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던졌다.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책임지며 우승컵을 안은 뒤 “팀에서 나를 필요로 했기에 마운드에 섰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불태웠다.

○ 투병 사실을 끝까지 알리지 않았던 고집불통

최 전 감독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8일 그의 부인 신현주 씨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신 씨는 “상태가 좋지 않다. 의식은 있지만 대화를 나누긴 어렵다”고 했다. 최 전 감독은 한 달 넘게 강남의 한 병원에 입원하다 6일 일산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병원 관계자는 “2007년 수술했던 대장암이 재발했고 다른 곳으로까지 전이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동안 최 전 감독은 어디가 아픈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괜찮다”고 했다. 일산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도 그는 “지인들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다. 신 씨는 “남편은 가족과 남은 시간을 조용히 정리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병마에 흔들리는 모습보다 씩씩하게 마운드에 올랐던 모습으로 팬들에게 기억되길 바랐던 거였다.

○ 롯데, 고인 명예감독 추대 고려

야구계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경남고 선배인 구본능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한국 야구 역사 속의 큰 선수가 사라졌다. 그의 육성과 기록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경남고 선배인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동원이는 아플 때도 ‘야구 현장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둔 투수는 다시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14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는 오른팔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최 전 감독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고인의 셋째 동생 최수원 씨(한국야구위원회 심판)는 “형님은 몸 상태가 나빴음에도 7월 22일 목동구장서 열린 경남고와 군산상고의 이벤트 경기에 참석했다. 마지막으로 모교 유니폼을 입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한 유언은 없었고 의식이 잠시 돌아왔을 때 가족에게 ‘건강해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야구팬들은 롯데 구단이 최동원의 등번호(11번)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롯데 구단은 최 전 감독을 위한 추모소를 15일 사직구장 2층의 자이언츠 박물관 내에 마련해 조문을 받기로 했다. 롯데는 고인을 명예감독으로 추대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 전설로 남은 무쇠팔

최 전 감독은 1970, 80년대를 호령했던 무쇠팔이었다. 두둑한 배짱으로 강속구를 던지며 정면승부를 마다하지 않던 인파이터였다. 그의 야구 인생은 화려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1981년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미국 프로야구 토론토와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했지만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빅 리그 진출은 좌절됐다.

최 전 감독은 1984년 롯데의 에이스로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1패)을 거두며 프로야구 30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썼다. 그러나 1988년 선수협의회를 추진했다는 이유로 그해 11월 삼성 김시진(넥센 감독)과 맞트레이드됐고 2년 뒤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고향을 등진 채 공을 던질 의욕을 잃어버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럼에도 최 전 감독은 롯데를 잊지 못했다. 1984년 롯데 유니폼을 입었을 때가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는 평소 “고향 부산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했다. 비록 현장은 떠났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야구장에 있다”던 그는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영면했다. 발인은 16일 오전 6시, 장지는 경기 고양시 자유로 청아공원. 유족으로는 부인 신현주 씨와 군 복무 중인 아들 기호 씨가 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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