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맞던 신병, 고참되자 폭력의 주동자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병영문화 확 뜯어고치자]<上> 가혹행위 악순환 왜
피해자가 가해자로… 폭력의 대물림



《병영 내 구타와 가혹행위는 ‘악마 같은’ 일부 사병만의 문제가 아니다. 입대 전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없는 병사도 일부는 군대에서 후임병을 구타하게 된다. 형언하기 힘든 구타와 가혹행위로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을 죽게 한 이모 병장(26)도 이등병 시절 선임병의 폭언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부대를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내가 선임병이 되면 때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이등병도 막상 선임이 되면 왜 아무 죄의식 없이 후임병을 구타하게 될까.》

본보가 현역 사병 7명과 최근 전역자 3명 등 10명을 면담조사한 결과 군내 폭력이 대물림되는 배경에는 ‘계급·호봉별 내무반 군기 책임’이 깔려 있었다. ‘군기 유지’라는 미명하에 ‘내리 구타’가 이어지는 것이다.

최근 육군의 한 포병여단에서 전역한 병사가 복무한 중대의 사례는 적나라하다. 오전 점호가 끝난 뒤 병장이 “아침 구보 때 목소리가 왜 이리 작으냐”고 지적하면 병장 진급 직전의 상병들이 각 내무반 선임 상병을 밤에 창고나 보일러실 등 간부들의 감시가 소홀한 장소로 집합시켜 구타했다. 선임 상병 전체가 ‘원산폭격’을 하고 내무반별로 한 명씩은 삽자루, 대걸레자루, 텐트 기둥 등으로 맞았다. 일부는 주먹과 발로도 맞았다.

이어 내무반별 선임 상병이 내무반 상병들과 일병 선임을 집합시켜 때렸고, 그 다음 날 일병 선임이 중대 내 맡은 구역을 청소하러 가서 일병·이등병을 구타했다. 신병들은 취침 시간에 교육을 맡은 이등병 선임이나 일병들에게 침낭을 뒤집어 쓴 채 “군가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로 맞았다. 맞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상병, 일병 등이 이등병에게 “뽀뽀를 하기 전까지는 잠을 재우지 않겠다”며 성추행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전역자는 “내가 (선임병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는 후임병을 때릴 수밖에 없다”며 “때리거나 성추행을 하는 사람들 모두 입대 전에는 ‘멀쩡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구타와 병사 간 얼차려를 금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대관리훈령’을 통해 군기 유지의 책임을 지휘관에게 지우고 있다. 또 ‘병의 계급은 서열을 나타낼 뿐 상호 명령·복종 관계가 아니며 분대장을 제외하면 명령·지시를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군기 유지’라는 명분 아래 구타를 당하던 병사들은 구타가 당연하거나 필요악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1963년 발표한 ‘복종 실험’에서 실험 도우미는 실험대상자들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실험 담당자의 권위적 지시에 따라 잔인하게 전기충격을 가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자가 지시하면 평범한 이들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현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필립 짐바르도 박사의 1971년 실험에서도 평범한 대학생들을 2주간 폐쇄된 가짜 교도소에서 교도관과 죄수로 역할을 나누어 지내게 했는데 학생들이 교도관 역할에 몰입돼 죄수 역할의 학생들에게 가혹 행위와 위협을 가했다.

보복심리도 생겨난다. 8일 서울역에서 만난 한 육군 상병은 “후임병 때는 ‘내가 선임이 되면 악습을 끊겠다’고 다짐하지만 내가 ‘개고생’했는데 후임병들이 편한 것은 형평성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상황이라고 모두 구타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병들 간의 폭행으로 군기를 유지하는 현재의 구조 속에서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최초의 선인(善人)’을 기대하기 어렵다. 구타를 근절하겠다고 마음먹은 병사가 고참 병장이 돼 “이제부터 폭행은 없다”고 선언해도 “곧 제대할 병장이라 한가한 소리 한다”는 인식 아래 후임들이 말을 안 듣게 되는 것이다. 한 육군 전역자는 처음 후임병을 때렸을 당시에 대해 “내가 안 때리니까 후임들이 나를 우습게 보고 일을 똑바로 안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위계적인 사회조직에는 ‘공식적 관료제’와 별개로 주먹다짐 같은 ‘비공식적 네트워크’가 공존하는데, 사병은 계급이 오를 때 공식적 직위뿐 아니라 왜곡된 ‘비공식적 위계질서’가 같이 올라가는 것으로 인식한다”며 “암암리에 사병에게 부과된 군기 유지 책임을 덜어내야 폭력의 대물림을 근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종엽 jjj@donga.com·곽도영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