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제정신 아냐, 국경 닫히기전에…” 러시아인들도 ‘엑소더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0일 14시 16분


코멘트
AP 뉴시스
AP 뉴시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이 200만 명 넘게 생긴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고국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강화되는 제재와 블라미디르 푸틴 대통령의 억압으로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자국을 떠나고 있다고 9일 보도했다. 러시아 당국의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으나 WSJ은 핀란드, 터키, 조지아 등 인접국의 러시아인 입국 자료를 평년과 비교해 볼 때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를 떠난 사람이 수천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 항공제재로 하늘 길 막힌 러, 남은 핀란드행 버스·기차 계속 매진
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는 율리아 자카로바(36)는 8일 기차를 타고 핀란드로 건너갔다. 그는 “아버지가 ‘떠나, 떠나, 떠나라’면서 여기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하셨다”고 전했다. 스타트업 대표로 일하고 있는 그리스인 남편이 있어 러시아와 그리스를 오가며 살았던 자카로바는 이제 그리스에 정착할 예정이다.

현재 자카로바가 임신 7개월째인 것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지금 인식이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에서 출산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푸틴이 곧 계엄령을 발동해 검열을 강화하고 국경을 닫을지 모른다고 염려도 나온다. 이미 소셜미디어에는 거리를 지나는 군인들이 시민들을 불심검문 하면서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은 시민들이 무슨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를 일일이 스크롤하며 내용가지 샅샅이 들여보고 있다.

핀란드국경검문소에 따르면 2월까지 러시아-핀란드 국경을 건넌 러시아인은 4만4000명으로 전년 동기(2만7000명)에 비해 크게 늘었다. 러시아에서 핀란드행 버스, 열차는 계속 매진이다. 유럽연합 회원국은 물론 영국, 캐나다 등이 러시아 여객기의 자국 영공 이용을 금하자 러시아도 맞제재로 자국 항공사의 해당국 비행을 중지하면서 러시아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한정적인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항공업계들도 러시아에 부품수출 등 운영을 접으면서 현재 러시아 항공기는 벨라루스행을 제외한 국외선 운영이 모두 중단된 상태다. 이 때문에 핀란드 국영 철도 VR은 헬싱키-생페테르부르크 노선 차량 추가배치를 시도 중이다.
○ 프로파간다에, 탄압에, 제재에 지쳐 짐 싸는 사람들
그 외에도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한 국가들로 피신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스라엘의 경우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인 이민비자 발급건수가 1400건이 넘는다.

유대계인 막심 구비킨 씨(54)는 크렘린의 프로파간다에 넌더리가 나 이제 이스라엘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어머니가 프로파간다에 세뇌당한 게 그에게는 가장 큰 상처였다. 구비킨 씨는 “우리 어머니는 옛날엔 전 세계 모든 책을 읽으셨는데 말년에는 TV만 오래보셨다. 그 (크렘린의) 선전이 진짜 먹히더라”며 눈물을 흘렸다. 구비킨 씨 어머니는 최근 돌아가셨고 그는 어머니 장례를 마친 뒤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는 “난 이미 그간 푸틴이 제정신이 아닌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는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생페테르부르크에서 배우 겸 연출가로 일하던 한 여성은 침공 초기 반전 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됐다. 그는 풀려나자마자 5살 난 아들과 아르메니아로 떠나기 위해 짐을 쌌다. 당시에는 그나마 국외선 비행기가 정상 운영되던 때였다. 이 여성은 자신처럼 러시아를 뜨려는 러시아인들이 모인 공항에서 16시간을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탔다. 당장 한 두 달 버틸 돈밖에 없다는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던 한 50대 남성은 모스크바에서 아내에게 필요한 인슐린을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있는 인슐린을 모두 사 약으로 가득 채운 여행가방 2개, 생필품을 채운 여행가방 2개를 가지고 아내와 헬싱키행 열차에 올랐다. 이들은 헬싱키에서 비행기로 딸이 공부하고 있는 독일로 갈 예정이다. 그는 “지금 아니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 러시아 떠나도 지속될 카드 제재에 한숨 “북한 같은 상황이라면 못 살아”
거처를 유럽으로 옮기더라도 경제 제재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비자, 마스터카드 등이 러시아에서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이제 타국에서 신용카드를 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말목장 주인인 다샤 커릴로바 씨(55)는 일단 현금을 왕창 챙겨 핀란드로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말들을 돌보기 위해 조만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 생각이다. 커릴로바 씨는 “하지만 우리가 계속 북한같은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면 물론 말들을 데리고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푸틴은 미치광이다. 하지만 더 소름끼치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지지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의 IT 기업에 다니던 나탄 칼트 씨(36)는 전쟁이 시작된 후 아르메니아로 이동했다. 그는 친구들이 사는 조지아로 다시 이동할 계획이다. 일단은 러시아로 돌아갈 계획은 없다. 그는 “돌아가면 굴락(수용소)에 잡혀갈 게 걱정이 된다”고 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