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코널 턱’ 소동…외모 품평은 피할 수 없는 대세?[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2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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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에서 ‘매코널 턱’ 소동이 있었습니다. 상원 공화당을 이끄는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는 늘어진 턱으로 유명합니다. 올해 79세라는 나이에 따른 노화 현상 때문이죠. 매코널 대표 하면 턱이 가장 먼저 연상되지만 아무도 이를 대놓고 비웃거나 웃음거리의 소재로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외모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 미국 정치의 에티켓이죠.


그런데 매코널 턱을 정조준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수 리더십 자리를 놓고 매코널 대표와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퇴임 후 플로리다 주 마러라고 리조트로 물러갔지만 여전히 공화당 내 영향력이 큰 그는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매코널 대표를 “음침하고 뚱하고 웃음기 없는 정치꾼”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비난은 유치한 인신공격이지만 굳이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닙니다. 논란은 이 성명의 초판. 보좌관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얘기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성명 초판은 턱 얘기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첫 문장부터 “늘어진 턱에 똑똑하지 못한(having too many chins but not enough smarts) 정치꾼”이라고 매코널 대표를 몰아붙였다고 하죠. 보좌관들의 거센 만류로 “음침하고 뚱하고 웃음기 없는”이라는 한층 순화된 표현으로 성명이 발표된 것이죠.

노화에 따른 외모적 변화는 누구에게나 서글픈 일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노화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차원에서 턱을 삶의 연륜과 결부시킵니다. 늘어진 턱을 ‘지혜의 턱(wisdom chin)’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매코널 대표를 가리켜 “턱 주름도 많으면서 지혜롭지 못한 정치꾼”이라고 비난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죠. 어쨌든 불시에 턱 굴욕을 당할 뻔한 매코널 대표는 “내 자신을 그(트럼프)의 수준까지 낮추지 않겠다”며 대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번 턱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트럼프 전 대통령도 외모적으로 볼 때 매코널 대표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올해 75세로 목 부근에 지방이 많이 축적된 트럼프 전 대통령도 비슷한 턱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소셜미디어에서는 매코널-트럼프 턱 비교 사진이 많이 나돌고 있죠.

좀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상대방의 외모, 특히 외모적 약점을 도마에 올리는 트럼프 식 조롱 정치의 재가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외모나 신체적 특징을 비하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입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때문이기도 하고 전통적 매너(예법) 때문이기도 하죠. 흔히 ‘바디-쉐이밍(body-shaming)’이라 불리는 외모에 대한 공개적 비판은 특정 성별이나 인종 연령, 또는 신체적 특징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도덕적 수준 미달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자기 관리가 부실한 듯 보이는 초비만형 유명인들이 많지만 이것이 화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풍자가 생활화된 미 TV 심야토크쇼 진행자들도 외모 조롱만은 피하죠.

이를 바꿔놓은 것이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특히 2016년 대선 때 외모를 공격 소재로 삼는 트럼프의 유세 전략은 유명했죠. 특히 여성의 외모를 도마에 올리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최근 텍사스 한파 사태 와중에 멕시코 칸쿤 휴가에 대해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다고 해서 비난을 받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의 부인 하이디 여사는 이미 트럼프 전 대통령의 ‘외모 품평회’에서 굴욕을 당한 전력이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6년 유세 때 경선 경쟁 상대였던 크루즈 의원의 부인과 자신의 아내 멜라니아 여사의 사진을 나란히 트위터에 올리고 “비교 불가”라고 비웃었죠. 크루즈 의원은 “나를 공격하는 것은 괜찮지만 내 아내만큼은 가만 놔둬”라고 발끈했죠. 그런가 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진 MSNBC 방송의 여성 앵커에 대해 “주름 제거 수술로 피부를 하도 끌어당겨 얼굴에서 피가 나더라”는 섬뜩한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칠 것 없는 트럼프의 조롱 정치에 “불편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지지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정치학자들은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의 시초를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에 부상한 ‘외모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으로 보고 있습니다. 레이건 시대는 외모와 겉치장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 받습니다. 특히 여성의 진한 화장과 잘록한 허리 등을 강조한 패션이 대세였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디어의 도움으로 백인 남성 중심의 포퓰리즘 성향을 파고든 것이죠. 전문가들은 미국 언론이 트럼프의 외모 조롱을 비판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부추긴 측면이 크다고 지적합니다.

2016년 레스 문브스 당시 CBS 회장은 외모 조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트럼프 유세를 지켜보며 “그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은 미국 뿐 아니라 방송 시청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제프 저커 당시 CNN 사장은 “트럼프가 이전까지는 뒤에서 수군거리던 외모에 대한 논의들을 공론화시킨 업적은 있다. 그래도 미디어가 그의 외모 지상주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라는 반성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외모 비하 발언이 예상외로 열띤 반응을 이끌어내자 다른 정치인들도 너도나도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경쟁 상대 중 한 명이었던 마르코 루비오 공화당 상원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공 태닝 습관 때문에 피부색이 오렌지 빛깔로 변한 것에 대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렌지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비웃어 관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죠. 당선 뒤 대통령이라는 직책 때문에 많이 자제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퇴임과 함께 자연인으로 돌아가면서 매코널 대표를 시작으로 다시 조롱 정치를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세계도 외모에 민감합니다. 정치인이 희끗희끗하던 머리카락을 검정색으로 염색하고 등장하면 “이제 선거철이 됐구나”하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죠. 또한 성형강국답게 ‘안티 에이징’을 위한 보톡스 필러 시술을 받는 사례가 늘면서 쁘띠 성형중독 정치인 리스트도 나돕니다. 특히 눈썹 문신은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한 인기 시술로 꼽히죠. 노화로 인한 이중 턱 지방흡입술은 ‘대공사’라고 하는데 이러다가 어느 날 매코널 대표가 날렵한 턱 선을 자랑하면서 등장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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