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소 없고 “투표용지 접지말라”… 48분만에 ‘시황제 천하’ 박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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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시진핑 장기집권 개헌안 통과 현장

“개헌안이 통과됐습니다!”

11일 오후 3시 48분경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회의장 앞 전광판에 2958명 찬성, 2명 반대, 3명 기권, 1명 무효라는 수치가 표시됐다. 이와 동시에 왕천(王晨)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 큰 소리로 외치자 장내에서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찬성률 99.8%였다. 주석단에 앉아 회의 기간 내내 무표정했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비로소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시 주석 바로 옆에 앉은 리커창(李克强) 국무원 총리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 규정을 삭제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13기 전국인대 3차 전체회의가 오후 3시 시작된 지 48분 만이었다. 기표가 시작된 뒤로는 32분 만에, 개표가 시작된 뒤로는 불과 12분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시절 발생한 문화대혁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헌법에 넣은 ‘국가주석, 국가부주석의 2연임 초과 금지’ 조항이 36년 만에 사라지는 과정은 이처럼 순식간이었다. 만장일치나 다름없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임기 제한 삭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시 주석의 장기 집권이 기정사실화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날 “통과는 확실했고 찬성표가 몇 표인지 보는 데만 가치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00% 찬성’ 결과가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와 기권 표를 끼워 넣었다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대표들은 비밀이 보장되는 별도의 기표소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A4 용지 크기의 분홍색 투표용지에 인쇄된 찬성 반대 기권 중 한 곳에 전용 펜으로 색칠했다. 시 주석이 찬성에 표기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이를 붉은색의 전자투표함에 넣어 투표용지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투표용지는 중국어뿐 아니라 조선어 등 소수민족 7개 언어도 같이 있었다.

방식은 무기명 기표 전자투표 방식이었지만 사실상 공개 투표였다. 회의 시작 20분 전 안내 방송을 통해 “투표용지를 접지 말고, 훼손하지 말고 젖게 하지 말라”고 두 차례 안내했다. “투표용지를 면이 보이도록 똑바로 세워 투표함에 넣으라”는 지시도 나왔다. 회의 시작 이후 투표 직전 다시 “투표용지를 접지 말라”고 강조했다.

전자시스템을 통해 투표 결과를 정확히 판독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대다수 대표는 투표 결과가 보이도록 투표용지를 손에 든 채 줄을 서 투표 순서를 기다렸다. 최고지도부인 당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원까지 마찬가지였다.

투표용지를 받는 것도, 투표도 서열 순이었다. 오후 3시 24분경 시 주석이 가장 먼저 투표용지를 앞으로 내보이며 투표했다. 투표하는 것만으로도 시 주석에게 커다란 박수가 터졌다. 이어 나머지 6명의 상무위원이 투표한 뒤 ‘제8의 상무위원’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시 주석의 오른팔 왕치산(王岐山) 전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투표했다. 중국 측은 애초 “표결권을 존중해달라”며 기표하는 장면을 기자들에게 비공개로 하려 했으나 기자들이 퇴장하는 동안 기표가 끝나면서 유야무야됐다.

이날 “중국 공산당의 지도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는 조항이 헌법의 맨 앞인 제1장 총칙 제1조 2항에 추가됐다. 이로써 지난해 10월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정부 군대 사회 학계는 동서남북과 같다. 당이 중심이다. 당이 모든 것을 지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시 주석 주장의 헌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시 주석에게 권력이 집중된 공산당이 정부와 군대를 장악, 통제함으로써 시 주석의 장기 집권도 수월해졌다.

덩샤오핑은 1978년 말 집권 이후 마오쩌둥 시대처럼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해 당과 정부의 분리를 강조했다. 시 주석의 이번 개헌안은 덩샤오핑 정신에서 후퇴하고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지적이 중국 내에서 나온다. SCMP는 “당이 모든 일을 정확히 지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오쩌둥 비서를 지낸 전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리루이(李銳)는 홍콩 밍(明)보에 개헌에 대해 “종신제를 하려는 것이다. 중국 문화는 개인숭배가 쉽게 나타날 수 있다. 마오쩌둥에 이어 시진핑이 이 길을 가고 있다”며 “북한과 중국만이 이런 길을 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개헌안 통과 직후 이례적으로 사설을 발표해 “개헌이 민족 부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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