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논란 부르는 트럼프 화법 분석해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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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발언으로 언론 선점… 궁지 몰리면 말바꿔 ‘어물쩍’
“트럼프주의는 계속 남을 것”

‘대중을 화나게 만드는 문제성 발언을 퍼부어→언론의 헤드라인을 떠들썩하게 장식한 다음→막다른 위기에 몰리면 해당 발언을 부정하며 교묘히 빠져나간다.’ 이런 ‘3단계 화법’이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70)의 전매특허라는 분석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9일 트럼프가 경선 초기부터 자극적인 논쟁을 즐겨 하며 시선 끌기에 성공했지만 최근 들어 너무 빈번히, 그리고 수위를 넘긴 발언까지 퍼붓다가 지지층 이탈이라는 역풍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급기야 이날엔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암살 교사를 암시했다는 논란까지 벌어졌다. 트럼프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윌밍턴 유세에서 “클린턴은 수정헌법 2조를 근본적으로 없애길 원하고 있다”고 운을 뗀 뒤 “만약 힐러리가 (당선돼) 연방 대법관을 임명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어 “수정헌법 지지자라면 혹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문제가 됐다.

수정헌법 2조는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대부분의 총기 소유 지지자들이 여기에 동감하고 있다. 트럼프가 수정헌법 2조 지지자들에게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암살 교사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민주당 측은 맹비난했다. 대표적 총기 규제론자인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코네티컷)은 트위터를 통해 “단순한 실언으로 여겨선 안 된다. 암살 위협이자 국가 위기와 비극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심각하게 높이는 발언”이라고 성토했다. 클린턴 캠프는 “대통령 후보는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자 트럼프 캠프는 “수정헌법 지지자들의 집단적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언급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이런 3단계 화법은 최근 들어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트럼프는 2일 버지니아 주 애슈번 유세 도중 아이가 너무 울어 방해되자 아이 엄마에게 “아기를 데리고 나가도 좋다”라고 말했다가 비난을 받자 “그냥 농담이었다”며 어물쩍 넘어갔다. 지난달 27일 플로리다 주 기자회견에서는 “러시아가 (클린턴의) 사라진 e메일 3만여 건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가 러시아를 대선에 끌어들이겠다는 뜻이냐는 비난이 커지자 “단순히 비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발언의 후폭풍은 오래갔다.

경선 초기에 무슬림과 멕시코 불법이민자 등에 한정됐던 논쟁이 최근에는 애국심(전사자 유족 비하), 가족의 가치(아기 퇴장 논란), 생명 위협(클린턴 암살 교사 논란) 등 미국과 인간의 기본가치 폄훼 논쟁으로 확산되면서 지지자들이 급속히 이탈하고 있다.

WP는 “트럼프의 발언들이 실제 농담이거나 비꼰 표현일 수 있고, 그의 말대로 진의가 왜곡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경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며 트럼프 측을 이해하려는 듯한 단서를 달았지만, 트럼프의 뜻은 표 결집을 위한 의도된 도발이라는 쪽에 무게를 뒀다.

“트럼프가 사라져도, 트럼프주의(Trumpism)는 사라지지 않는다.”

트럼프주의는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몰고 온 정치 현상이다. 워싱턴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와 자유무역과 이민에 대한 회의, 미국 개입주의(국제주의)에 대한 의구심이 버무려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일컫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일 “요즘 인기가 크게 떨어진 트럼프와 트럼프주의를 구분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보도했다. 설사 트럼프가 패배하더라도 트럼프주의 현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최근 여론조사에서 힐러리 클린턴(69)에게 밀리고 있지만 트럼프주의를 대표하는 후보가 트럼프밖에 없다면 그 위력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최근 WSJ와 NBC방송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의 능력과 자질 측면에서 누가 더 나은가’라는 질문에서 트럼프는 거의 전 항목에 걸쳐 클린턴에 열세였다. 그러나 ‘워싱턴 기성 정치에 변화를 가져올 능력’에서만큼은 트럼프가 48% 대 26%로 크게 앞섰다. 트럼프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미국의 총체적 위기를 강조한 반면 클린턴은 희망적인 발언을 많이 했다. 트럼프 연설에 동의하는 유권자는 52%였지만 클린턴 연설은 36%의 지지만 얻었다.

WSJ는 “트럼프가 트럼프주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미 유권자들 저변에 깔려 있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와 현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에 트럼프가 잘 올라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 덕분에 트럼프는 역대 어느 공화당 대선 후보보다 폭발적인 풀뿌리 동원력을 과시하고 있다. 트럼프가 7월 한 달간 200달러 이하 소액 기부로 모금한 자금은 6400만 달러(약 701억 원)에 이른다. 4년 전 공화당 후보 밋 롬니의 같은 기간 모금액(1900만 달러)의 3배가 넘는다. 대표적 진보 인사인 마이클 무어 영화감독조차도 최근 블로그 등을 통해 “인정하기 싫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 같다. 기성 정치권에 분노하는 유권자들이 ‘트럼프가 당선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에서라도 그를 찍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뉴욕=부형권 특파원
#트럼프#수정헌법#미국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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