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 왕국’ 이끈 게임의 거인, 이와타 사토루 사장 잠들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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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은 사장, 머릿속은 개발자… 그러나 마음속은 항상 게이머”

“명함에는 사장이라고 쓰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저는 게임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저는 게이머입니다.”

2005년 미국에서 열린 게임 개발자 콘퍼런스. 기조연설자 이와타 사토루(巖田聰·56·사진) 닌텐도 사장이 연단에 올라와 처음 한 말이다. 객석에 앉은 전 세계 게이머들은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슈퍼마리오’ 등으로 유명한 게임회사 닌텐도는 13일 오전 이와타 사장이 11일 담관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56세. 게임산업의 거인으로 꼽혔던 그가 경영을 맡은 2002년부터 2015년까지 13년 동안 닌텐도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우뚝 섰다가 쇠퇴 후 다시 재기하는 등 부침을 겪었다.

○ 천재 프로그래머, 게임 역사를 바꾸다

이와타 사장은 1959년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 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혼자서 미국 HP 전자계산기로 간단한 게임을 만들 정도로 게임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게임을 보내자 놀란 HP에서 여러 제품을 그에게 보냈다고 한다.

도쿄공대를 졸업하고 게임 개발 업체인 할(HAL) 연구소에 프로그래머로 입사했다. 이후 닌텐도용 게임을 만들며 사장까지 올랐다가 2000년 야마우치 히로시(山內溥) 당시 사장의 권유로 닌텐도에 합류했다. 2002년 43세의 나이로 사장까지 올랐다. 오너 일가가 아닌 사람이 경영을 맡은 것은 회사 창립 이후 113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가 취임할 당시 닌텐도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에 밀리고 있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에 쫓기는 실정이었다. 게임 시장은 컴퓨터 온라인 게임 위주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와타 사장은 취임 후 “기술 중심이 아닌 고객 중심의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며 게임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게임기 개발에 착수해 2004년 ‘닌텐도 DS’, 2006년 ‘닌텐도 위(Wii)’라는 세계적인 히트상품을 내놓았다. 청소년의 전유물이었던 게임을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진화시킨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

2005년 5000억 엔(약 4조6000억 원) 남짓이던 매출이 2008년 1조8000억 엔(약 16조6000억 원)으로 급등했고 2009년 미국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구글과 애플을 제치고 닌텐도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꼽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우리는 왜 못 만드느냐”고 말해 화제가 된 것도 이때였다. 한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닌텐도를 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받는다는 ‘닌텐도 왕따(닌따)’라는 말까지 생겼다.

○ 라이벌 소니도 애도 표명

게임업계는 2010년 전후 스마트폰 위주로 급속하게 변화했다. 하지만 닌텐도는 스마트폰용 게임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이와타 사장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 대담에서 스마트폰을 “콘텐츠의 가치를 지키려 하지 않는 플랫폼”이라고 비판하며 “콘텐츠의 가치, 게임의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게이머다운 이상이었지만 시장은 냉정했고 닌텐도는 4년 연속 적자를 냈다.

결국 닌텐도는 최근 스마트폰용 게임 개발 계획을 밝히며 백기를 들었다. 엔화 약세, 원가 절감 노력에 힘입어 2014년에는 영업이익이 흑자로 돌아섰다. 이와타 사장은 “닌텐도다운 실적을 다시 보여주겠다”며 최근까지 헬스 분야, 테마파크 등 신사업 진출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결국 지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CNN 등 해외 언론은 그의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으며, 라이벌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와타 씨,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닌텐도#이와타 사토루#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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