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아빠를 ‘코리안 보이’라 부르는 아이… 한번만 만나줬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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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버려진 코피노]
‘코피노 엄마’ 메리 이야기
열일곱살 내게 그는 전부였다… 같이 살아달라는게 아니에요

아이의 가족그림속 ‘이름없는 아빠’ 필리핀의 한 코피노 소년(6)이 취재진에게 그려 준 자신의 가족 그림. 소년은 엄마를 비롯해 함께 사는 식구들을 그린 뒤 단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를 빈 곳에 그려 넣었다. 왼쪽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이 소년의 아버지(사진 위 점선 안)다. 
소년은 취재진에게 “그림을 보고 아빠를 찾아주세요”라고 말했다. ‘I Love my family(나는 가족을 사랑해요)’라는 
글귀가 적힌 아버지의 사진을 쥐고 있는 아들을 엄마 메리가 꼭 안고 있다(아래 사진). 앙헬레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아이의 가족그림속 ‘이름없는 아빠’ 필리핀의 한 코피노 소년(6)이 취재진에게 그려 준 자신의 가족 그림. 소년은 엄마를 비롯해 함께 사는 식구들을 그린 뒤 단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를 빈 곳에 그려 넣었다. 왼쪽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이 소년의 아버지(사진 위 점선 안)다. 소년은 취재진에게 “그림을 보고 아빠를 찾아주세요”라고 말했다. ‘I Love my family(나는 가족을 사랑해요)’라는 글귀가 적힌 아버지의 사진을 쥐고 있는 아들을 엄마 메리가 꼭 안고 있다(아래 사진). 앙헬레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금은 내 상황이 어려워. 하지만 5년만 줘. 5년 뒤에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을 찾겠어. 꼭 돌아올게.”

2008년 2월 A 씨(42)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당시 열아홉 살의 메리(25)를 두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A 씨의 이름을 딴 아이가 여섯 살이 됐지만 메리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연락도 닿지 않는다. 닳아빠진 사진으로만 아버지의 얼굴을 본 아들은 외삼촌이 부르는 대로 아버지를 불렀다. “코리안 보이”라고.

2006년 3월경이었다. 열일곱 살이던 메리는 필리핀 앙헬레스 시의 한 마사지 숍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오전 3시 한 한국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렇게 어린데 왜 여기서 일하니?”(A 씨)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요.”(메리)

“너는 여기 어울리지 않아. 네 전화번호를 물어봐도 되겠니?”(A 씨)

며칠 뒤 전화가 걸려왔다. A 씨는 필리핀 루손 섬 북부에서 사업을 한다고 했다. 친절한 남자였다. 친구로 지내던 어느 날 A 씨가 “너를 내게 줘. 내가 널 도와줄게”라고 말했다. 한국에 아내가 있지만 별거 중이라고 했다.

메리는 그와 사귀었다. 남자는 메리의 학비를 댔다. 2008년 2월 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됐다. 임신 4주차였다. “그를 사랑했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어요. 그는 나의 첫 남자친구였고, 첫 번째 모든 것이었어요.”

당시 A 씨는 한국으로 귀국한 후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메리는 배 속의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야, 엄마는 행복하단다. 나는 널 가진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 왜냐하면 너는 날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거든. 엄마는 널 위해 강해질 거야.”

2008년 10월 2일 아이가 태어났다. 난산이었지만 A 씨는 곁에 없었다. 메리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가 없어 병원에서 퇴원할 수가 없었다. 친척 언니와 학교 선생님에게 돈을 빌렸다.

메리는 A 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e메일을 주고받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답신이 오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지 2주일 뒤 A 씨가 e메일을 보내왔다. “비자 문제 때문에 내가 여기서 일하는 게 불법이야.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임금이 너무 적어. 인터넷으로 e메일을 체크할 돈도 없어. 네가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여기서 생존하는 게 먼저야. 메일은 한두 달에 한 번은 체크할 거야. 몸조심해.”

그 뒤로 메리가 보낸 e메일은 반송됐다. 도움이 필요했다. 누구에게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필리핀 내 코피노 지원단체를 찾았다. A 씨의 사진을 보여주자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 “그가 목사인걸 아나요?” 충격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과거 그의 설교 모습도 찾을 수 있었다.

메리는 2년제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뒤 온라인 영어교육 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오전 2시에 일어나서 오전 4시까지 출근하고 오후 2시에 집에 돌아와 아이를 보는 일상이 반복됐다. 집에 없는 동안에는 어머니가 외손자를 돌봤다. 지난해 7월에는 새벽에 출근하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일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을 보면 힘이 솟았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아들이 나를 보고 웃고 즐겁게 놀면서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 강해졌어요.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어요.”

하지만 아들은 아빠를 그리워했다. 아들은 친구 아빠가 학교에 친구를 데려다주는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메리는 아들에게는 “아빠는 멀리 일하러 가셨다”고만 했다. 험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족의 날’ 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아이가 더 자라서 사실을 알게 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은데 어쩌죠?”

취재진이 3월 메리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은 “이 사람도 네 아빠처럼 코리안”이라고 기자를 아이에게 소개했다. 아이는 연필로 자기의 가족을 그렸다. 아이는 아빠를 그려 넣은 뒤 할머니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 그림이 이 아저씨가 아빠를 찾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메리는 취재진에게 A 씨를 찾아서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말을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지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아들이 자라고 있어요. 아들이 당신을 그리워해요.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서 아이의 미래가 더 나아지기를 원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함께 살자는 게 아녜요. 적어도 아이가 학교 친구들에게 ‘드디어 아빠를 만났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필리핀에 와서 아들을 만나줘요.”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A 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아내, 아이들과 함께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A 씨는 메리를 떠난 지 6년 4개월 만인 이달 4일 메리에게 e메일을 보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어. 날 용서하기를 바라지 않아. 모두 나의 잘못이야.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가족을 데리고 살기 힘들었어. 적은 돈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보낼게. 지금도 영주권이 없어서 미국을 떠날 수 없어. 영주권이 생기면 꼭 아들을 보러갈게. 아들에게 말해줘. 정말 미안하다고. 그립고, 보고 싶다고.”  

앙헬레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코피노#필리핀#자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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