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앙숙 프랑스-터키 ‘과거사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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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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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하원 ‘아르메니아 학살 규탄’ 법 가결에 관계 악화
‘터키 EU가입 반대’ 사르코지에 쌓인 앙금도 한몫

터키와 프랑스가 거의 100년 전 벌어진 비극적 학살사건을 놓고 심각한 외교마찰을 벌이고 있다. 아랍의 봄과 남유럽 경제위기 등 현안 대처를 위해 관련국의 단합이 필요한 시점에서 유럽연합(EU)의 유일한 이슬람권 회원국이 되려는 터키의 과거사를 놓고 벌이는 감정싸움은 주변국들을 우려케 하고 있다.

이번 마찰의 발단은 22일 프랑스 하원이 제1차 세계대전 말기 터키군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사건을 부인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법안은 터키의 전신 오스만제국이 1915∼1916년 아르메니아에서 150만 명을 대량 학살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경우 징역 1년과 벌금 4만5000유로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법안 통과 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즉각 양국 정치 지도자의 상호방문 중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서의 군사협력 중지, 파리 주재 대사 소환 등 강경 조치를 발표했다. 터키 측은 내년 4월 말 대선 1차 투표를 앞두고 사회당 후보에 크게 뒤처져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프랑스에 거주하는 약 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표를 의식해 법안 통과를 주도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프랑스야말로 대량 학살의 대명사이며, 제국주의 국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일 비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지배 시절 전체 인구의 15%로 추정되는 사람을 대량 학살했다. 이는 ‘인종청소’였다”며 “사르코지 대통령의 부친이 알제리 독립세력과의 게릴라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대량학살’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터키 측의 강경 대응에는 그동안 누적돼온 불만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2007년 사르코지 대통령 집권 이후 프랑스와 터키의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악화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터키의 앙숙 그리스와 함께 터키의 EU 가입 반대를 주도했다. 프랑스가 터키의 EU 가입을 반대한 표면적 이유는 터키의 경제 수준(1인당 국민총소득 1만 달러)이 낮고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인권 상황이 EU 가입 자격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구 약 7200만 명의 이슬람 국가가 EU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바탕에 깔려 있다.

터키 측의 비판에 대해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는 누군가를 가르치기를 원치 않지만 동시에 가르침을 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며 “프랑스는 신념 인권 역사를 존중한다”고 받아쳤다.

그러나 두 나라 관계가 파국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프랑스 정부와 의회에도 법안 반대자들이 적지 않다. 프랑스 언론은 법안은 상원에서 토론만 하다가 부결돼 다시 하원으로 올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하원은 총선을 앞두고 내년 2월에 해산되기 때문에 결국 법안이 폐기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 ::


오스만튀르크제국 당시 이스탄불 등 대도시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이슬람계 튀르크인이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두 차례에 걸쳐 학살한 사건. 첫 번째는 1894∼1896년에, 두 번째는 1915∼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가 시작되면서 각각 벌어졌다. 현대사의 첫 조직적 학살사건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을 이어받은 터키 정부는 전시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을 침공한 러시아군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던 아르메니아인 전투원이나 스파이가 죽은 것이며 숫자도 부풀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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