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오피스 플랑크톤’의 반란… 모스크바 12만 反푸틴 시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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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위에도 최대규모 인파… 고르비 “푸틴, 3선 포기해야”

성탄절 휴가도, 살을 에는 강추위도 러시아의 성난 민심을 막진 못했다.

총선 부정 논란으로 촉발된 ‘반(反)푸틴 집회’에 모스크바에서만도 24일 약 12만 명(주최 측 집계·경찰 추산 3만 명)이 모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열린 이번 집회는 10일 시위(약 5만 명)를 뛰어넘어 옛 소련 붕괴 이후 최대 규모 기록을 경신했다. 특히 정치에 무관심한 성향인 데다 결집력도 없어 힘없는 민초로 분류되는 사무직 근로자를 지칭하는 ‘오피스 플랑크톤(Office Plankton)’ 세력이 이번 집회에 대거 가담하며 파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시위는 러시아 내에서도 실패 확률이 높다고 점쳐졌다”고 전했다. 내년 1월까지 이어지는 장기 휴가 시즌이 이미 시작된 데다 당일 러시아 전역에 한파가 몰아쳤기 때문. 집회를 이끄는 구심점도 불분명했고, 국내 언론의 비보도 속에서 입소문 홍보는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번 집회가 실패하면서 반푸틴 열기를 누그러뜨리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시위 열기는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모스크바는 물론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전국 60여 개 도시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열렸다. 특히 이날 모스크바 사하로프대로엔 푸틴의 대항마로 떠오르는 알렉세이 쿠드린 전 재무장관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재벌 미하일 프로호로프 씨, 유명 블로거 알렉세이 나발니 씨 등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 민심을 자극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현지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은 대선에 나서지 말고 물러나야 한다”고 말해 시위 지지 의사를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집회의 성공 요인으로 ‘오피스 플랑크톤 세력의 가담’을 꼽았다. ‘사무실의 힘 없는 민초’ 정도로 해석되는 이들은 중산층 출신 30, 40대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1987년 한국 민주화의 주역인 넥타이부대와 닮았다.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많고, 개혁보단 안정을 지향한다. 성향은 ‘친(親)푸틴’ 쪽에 가깝다. 러시아 일간지 모스크바타임스는 “연말이면 해외로 휴가 가기 바빴던 이들이 이번 시위에 총출동해 정부와 시위대 양쪽을 모두 놀라게 했다”고 보도했다.

오피스 플랑크톤의 변심은 푸틴 진영이 자초한 결과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영국 BBC방송은 “정부 부패에 대한 피로도가 큰 시점에서 총선마저 부정을 저질렀다는 국민의 실망을 정부가 가벼이 여겼다”고 지적했다. 특히 푸틴 총리가 15일 TV 인터뷰에서 이번 시위의 상징인 ‘하얀 리본’을 “축 늘어진 콘돔 같다”고 비아냥거린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정부 통제 바깥에 있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가장 익숙한 이들이 화이트칼라 계층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번 시위에서 표출된 열기가 본격적인 반푸틴 운동으로 확산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오피스 플랑크톤과 시위대 주도세력의 미묘한 견해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10일 집회 때부터 총선 논란에서 한발 더 나아가 푸틴 재집권 저지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러시아 넥타이부대는 ‘선거부정 조사’와 ‘정치부패 척결’엔 뜻을 같이하지만, 푸틴에 대해선 여전히 심정적 지지가 큰 편이다. 러시아 정치평론가 드미트리 피트리모프 씨는 “푸틴을 반대한다는 건 러시아에서 일종의 혁명인데 이에 대한 중산층의 거부감도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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