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명과 바꾼 병사 1명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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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 재소자 풀어주고 5년만에 포로 구출

2006년 6월 25일. 길라드 샬리트 상병(24·사진)은 여느 때처럼 이스라엘 가자지구 남부 인근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 후임 근무자와 교대하지 못했다. 국경 밑 땅굴을 파고 넘어온 팔레스타인 최대 무장정파 하마스 대원들의 기습공격을 받고 납치됐기 때문이다.

1994년 한 병사가 하마스에 납치돼 살해된 이후 12년 만에 하마스에 납치된 이스라엘 병사인 샬리트 상병을 구출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사흘 뒤인 6월 28일 가자지구에 대규모 보복공습을 가했다. 하지만 샬리트 상병을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다.

납치된 지 1934일. 샬리트 상병은 마침내 고국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됐다.

계급도 병장으로 승진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극적 합의로 다음 달 석방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11일 샬리트 상병과 이스라엘 교도소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인 1027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고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 등이 전했다.

샬리트 상병의 송환 문제를 놓고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2006년부터 5년 3개월여간 지난한 협상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협상은 매번 결렬됐다.

하마스는 샬리트 상병의 석방 조건으로 줄기차게 팔레스타인 재소자 1000명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스라엘은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샬리트 상병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귀환시켜야 할 ‘이스라엘의 아들’이 됐다.  
▼ “이스라엘의 아들 구하라” 국내외 압력에 마라톤협상 타결 ▼

하마스는 샬리트 상병이 생존해 있음을 알리는 친필 편지와 육성 테이프를 간간이 내놓으며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2009년 10월에는 샬리트 상병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는 대가로 이스라엘로부터 여성 재소자 20명을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테러를 저지른 중범죄인은 절대 석방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온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의 고민도 커져갔다. 샬리트 상병의 송환 문제가 징병제 국가인 이스라엘 내각에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샬리트 상병 피랍 1000일을 기점으로 그의 가족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관저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샬리트 상병을 풀어줄 것을 촉구하는 국민들의 시위와 행진도 잇따랐다. 자녀가 19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보내야 하는 부모들에게 샬리트 상병의 피랍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제2, 제3의 샬리트 부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협상 초부터 중재자로 나섰던 이집트에 독일까지 가세했고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단체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노력도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정부의 부담은 더욱 커져갔다.

네타냐후 총리는 샬리트 상병과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맞교환하는 합의안을 처리하기 위해 11일 오후 6시경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후 이어진 투표 결과는 26 대 3. 네타냐후 총리는 “우리가 최선의 합의에 도달했다고 믿고 싶다”며 합의안이 타결됐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칼레드 마샤알 하마스 최고지도자 또한 TV 연설을 통해 같은 소식을 전했다.

샬리트 상병의 석방 협상 타결을 계기로 미온적이던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평화협상에도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AP통신은 전망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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