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판 직접민주주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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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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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 아이슬란드 14일 시민 1500명 모여 활로 찾기

인구 0.5% 무작위 선발… 정부개입 없이 국민회의 개최
트위터 통해 실시간 중계… 누구나 토론과정 참여 가능


집단지성이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나라에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군중심리만 폭발해 나라가 더 혼란에 빠지게 될까. 14일(현지 시간) 아이슬란드에서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벌어진다.

이날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선 전국에서 모인 1500명의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아이슬란드 국민회의’가 열린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고 서유럽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국가부도 사태에 빠진 아이슬란드가 정치 사회 경제 현안을 해결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집단지성’에 길을 묻는 것이다. 10여 년 전 외환위기에 직면했던 한국이 ‘금 모으기 운동’을 온 국민의 역량을 결집하는 계기로 삼았다면 아이슬란드는 국민회의를 위기극복의 돌파구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국민회의에 참석하는 1500명 가운데 1200명은 18세 이상 성인 남녀 국민을 통계적 대표성을 갖도록 분류한 뒤 무작위로 선발했다. 모든 사회계층이 망라될 수 있도록 나머지 300명은 아이슬란드 내 각 기구와 단체 대표들로 구성된다.

1500명은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 32만 명의 약 0.5%에 해당한다. 한국으로 치면 인구 4900만 명 중 25만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셈이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가 21세기 판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국민회의는 여야 정당이나 기존 이익단체와 상관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행사로 ‘앤트힐(Anthill·개미둑)’이라는 시민단체연합이 행사를 주관한다. 앤트힐은 개미들이 강둑의 붕괴를 볼 수도 없고 알아차리지도 못하지만 홍수나 폭우로 자신들의 터전이 무너질 위기가 생기면 집단적으로 탈출해 생존하는 데서 따온 말로 집단지성을 상징한다.

아이슬란드 외교부의 우르두르 군나르스도티르 대변인은 기자와의 e메일에서 “이번 회의는 아이슬란드 국민의 위기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행사”라며 “정부는 이 회의를 주관하거나 관여하지 않지만 이 회의를 지지하며 회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는 “통계적으로 전 국민을 대표하는 집단이 한자리에 모여 국정방향을 논의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며 “이번 회의는 현대 정치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1500명이 모여서 어떻게 회의를 할까.

국민회의는 회의 진행방식도 획기적으로 바꿨다. 주제발표, 모두연설 같은 기존 형식을 모두 없앴고 기존 국회나 지방의회, 지자체 주민회의 등에서 하던 방식의 토론도 배제했다. 1500명의 참가자들은 수많은 그룹으로 나눠서 토론하는데, 각 그룹에는 리더나 대표도 없고 토론진행을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된 중재자(facilitator)만 있다.

회의 전반부는 ‘아이슬란드 사회가 추구해야 할 핵심 가치’를 주제로 논의하고 후반부엔 복지 건강 법률 교육 비즈니스 등 부문별로 구체적인 토론을 진행한다.

회의 전 과정은 인터넷 단문 블로그 서비스인 트위터를 통해 생중계되고 모든 아이슬란드인들은 트위터를 통해 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도 특징이다.

현지 언론사 기자인 스반보르 시그마르스도티르 씨는 “통보를 받은 1500명 중 1200명 이상이 참가하겠다고 약속했다”며 “경제위기 이후 아이슬란드에서는 위기의 주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녀사냥’만이 횡행했는데 이제 아이슬란드인들도 미래의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정치학)는 “한국 국회에서 보듯이 엘리트 중심의 대의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며 한계를 보이고 있다”며 “아이슬란드의 실험은 그런 점에서 세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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