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학원강사 “쇼핑? 100엔숍 아니면 못가요”

  • 입력 2009년 9월 1일 02시 52분


코멘트
[경제위기 1년 세계 중산층 리포트]<1>명암 갈린 삶
부동산투자 된서리 맞은 아이슬란드 20대
“집값 거품 꺼져 원금도 못건질 판”
두번 연속 해고된 英 30대 전직 세일즈맨
“내집마련-결혼꿈 5년뒤로 미뤘죠”

앤터스 씨 가족은 밤이 깊어가면서 속에 담아둔 말들을 꺼냈다. 그는 연봉 6만5000달러를 받던 폴크스바겐에서 작년 9월 해고된 뒤 몇 달간을 생각하면 손부터 떨린다. 그 무렵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첫째인 에이든(9)을 학교에 보내고 둘째인 카이(3)와 놀아주는 것뿐이었다.

올해 4월 컨설팅회사인 ‘W3R’에 컨설턴트 자리를 겨우 구했지만 연봉이 5만5000달러로 줄었다. 외식도 하지 않고 영화관도 가지 않는다. 휴가 땐 아이들이 원했던 디즈니랜드 대신 비용이 덜 드는 레고랜드에 갔다. 에이든은 레고랜드 얘기가 나오자 자랑을 늘어놓았다. “조각 맞추기 게임에서 내가 만든 로봇이 최고였어. 또 가고 싶어.” 에이든을 무릎에 앉힌 아내 리사 씨(36)가 아들의 등 뒤에 고개를 파묻었다.

○ 외식도, 영화 관람도, 취미생활도 줄이는 가정

앤터스 씨 집에서 8000km나 떨어진 헝가리 부다페스트. 은행에서 일했던 쿠헐미 페테르 씨(41)는 올해 6월 중순 전체 직원 250명 가운데 25%를 내보내는 구조조정의 대열에 포함됐다. 지난달 10일 실업급여센터에서 하루를 꼬박 기다린 끝에 간신히 실업수당을 신청했다. 수당은 생활비에 조금 보탤 수 있는 정도.

독신이어서 부양가족은 없지만 집을 고치려고 작년 6월 스위스프랑으로 빌린 대출금이 걱정이다. 헝가리 국민들은 대부분 자국 통화인 포린트화로 대출을 받으면 연이율이 13∼15%으로 너무 높아 금리가 5% 정도로 싼 스위스프랑으로 빌려왔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포린트-스위스프랑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포린트화를 기준으로 한 페테르 씨의 대출 원금은 330만 포린트(약 2000만 원) 늘었다. 올해 초 원-엔 환율 상승으로 한국에서 엔화 대출을 받은 사람들의 상환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현상이 헝가리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페테르 씨는 소장한 책이 4000권이나 될 정도로 책 수집을 좋아하지만 해고 이후 수집을 중단했다. 게임을 좋아해 정품 소프트웨어를 많이 샀지만 요즘은 새 게임만 보면 눈을 질끈 감는다.



○ 유령마을로 변하는 아이슬란드 주택단지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이 ‘작지만 강한 나라’의 모범으로 여기며 부러워했던 아이슬란드는 부동산 거품 붕괴로 나라 전체가 고통 받고 있다.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남쪽으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클루크토르크 마을. 이곳에는 고급 아파트와 단독주택 건물이 50여 동(棟) 들어서 있지만 지금까지 단 두 가구만 입주했다. 레이캬비크 인근에는 이곳처럼 비어 있는 집이 수천 채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빈집이 많은 동네를 ‘유령마을(Ghost Town)’이라고 부른다.

기자는 레이캬비크에 사는 에를링 안데르센 씨(27)가 주택대출을 잘못 받아 애물단지가 됐다는 문제의 집을 함께 가봤다. 대통령 저택이 있는 탁 트인 바닷가 동네라서 그런지 에를링 씨의 집도 겉으로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집안에는 각종 자재들이 널려 있었다. 작년 4월 배선 공사를 중단한 뒤 집을 1년 넘게 방치해서다.

전기기사인 에를링 씨는 2007년 초 단독주택 매매로 1200만 크로나(약 1억5000만 원)를 벌었다. 쉽게 큰돈을 챙긴 그는 같은 해 말 지금 소유한 단독주택을 또 샀다. 당시 3200만 크로나였던 시세는 2500만 크로나로 떨어졌다. 원금에다 공사비로 300만 크로나가 더 들었으니 지금 팔면 1000만 크로나가량 손실을 본다.

건축업자인 팔미 팔슨 씨는 2007년에 아파트를 40채 이상 팔아 2억 크로나(약 26억 원)의 수익을 올렸지만 지난해 이후 3억 크로나 이상 손실을 보고 있다. 팔슨 씨는 “2년 전에는 매달 서너 채의 아파트를 팔았는데 지금은 2, 3개월에 한 채 팔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 멀어져 가는 인간관계

폴란드 바르샤바에 사는 엘지비에타 파스테르나크 씨(40·여)는 며칠 전 첫째 아이에게 화를 내고 몹시 후회했다. 통신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의 월급이 7월부터 15%나 줄면서 지출계획이 틀어진 데다 둘째를 낳은 뒤 신경이 예민해졌다. 남편의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꼴로 등산을 가곤 했는데 지금은 교통비와 외식비가 부담이 돼 거의 못 가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제관계학원(IBEI)에서 석사과정을 밟는 올린타 로페스 씨(28·여)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 만나기가 어려워서다. 그는 “전에는 남자친구가 하루 휴가를 내서 같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해야 한다더라”고 푸념했다.

영국 런던에서 ‘가정 에너지 측정사’라는 신종 직업을 시작한 데이비드 부시 씨(34)는 경제위기 때문에 결혼까지 미뤘다. 영국 최대 위생세척제 업체인 ‘캐논 하이진’에서 해고되지만 않았다면 모기지로 집을 산 뒤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한 살 아래 여자친구를 반려자로 맞을 계획이었다. 부시 씨는 “새 일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결혼이 5년은 더 늦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 경제위기 끝나간다지만…

이번 경제위기는 사회안전망이 탄탄한 것으로 정평이 난 일본 사람들의 삶조차 뿌리째 흔들어놓고 있다. 자동차회사 파견근로자로 일하다 작년 12월 해고된 구와타(가명·42) 씨는 지방자치단체가 마련해준 월 5000엔짜리 주거시설에 머물며 일용직에 종사하다 7월에 도쿄로 옮겨 한국의 벌집보다 더 좁은 ‘캡슐방’을 전전하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 노인요양센터에 사는 헬렌 맥레인 씨(82)는 매달 2000달러인 생활비를 내기 힘들어 센터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전에는 주식 배당금으로 생활비를 댈 수 있었지만 최근 실적 부진으로 배당금이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20일 밤 기자와 한잔씩 기울이던 위스키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앤터스 씨는 구직사이트에서 출력한 미군의 정보 분석분야 지원자 모집공문을 꺼내며 “이게 내 미래”라고 했다. 연금과 펀드를 포함한 모든 금융자산을 해지한 뒤 자녀교육과 노후에 대비한 의지처로 군대를 택한 것이다. 앤터스 씨는 “연봉은 지금보다 1만 달러 더 줄지만 의료보험, 자녀교육, 연금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이탈리아 중 어디서 근무하게 될지 통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술을 못하는 아내 리사 씨가 어느새 잔을 비우고 있었다.

특별취재팀

△ 팀장=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 미국 미시간·뉴욕=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 일본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 중국 상하이·우한=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 인도 뉴델리=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영국 런던·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정재윤 기자jaeyuna@donga.com

△ 독일 프랑크푸르트·네덜란드 암스테르담=정양환 기자ray@donga.com

△ 스페인 마드리드·바르셀로나=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 헝가리 부다페스트·폴란드 바르샤바=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아부다비=정임수 기자imsoo@donga.com

△ 브라질 상파울루=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