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면담때부터 위험 신호들… ‘죽이고 싶다’ 증오 가득”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4월 17일 02시 56분



“선글라스에 모자 깊숙이쓰고
뭘 물어도 10∼20초 뒤 답변
정신질환 조기대처 안하면
또다른 참극 언제든 되풀이”
美버지니아공대 참사 2주년… 조승희 지도교수 루신다 로이 씨 인터뷰


16일 0시. 미국 워싱턴에서 서남쪽으로 430km 떨어진 블랙스버그에 있는 버지니아공대 교정에 촛불이 켜졌다. 2년 전 이날 한국 출신 영주권자 조승희의 총격에 숨져간 32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이었다. 참사현장인 노리스홀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다시 문을 열었고(본보 13일자 A18면 보도), 추모마라톤과 촛불추모회 등이 열린 교정엔 상처를 극복하자는 다짐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참극을 막지 못했는지, 재발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한 자성과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조승희가 다닌 영문과의 학과장이자 지도교수였던 루신다 로이 씨(53)는 15일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당시 경고 신호들이 있었는데 놓쳐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유명 시인이며 작가이기도 한 로이 교수는 이달 초 ‘침묵할 권리가 없다-버지니아텍의 비극’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조승희에 관한 기억을 듣고 싶다.
“2004년 봄 내 강의에 처음 들어왔다. 수강생이 2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여서 특별한 만남은 없었다. 당시 조가 e메일을 보내 학점과 출판 등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다 2005년 10월 동료 여교수가 조가 쓴 (섬뜩한 내용의) 시들을 보여 주며 걱정을 털어놓았다. 조에게 e메일을 보내 연구실에서 한번 보자고 했는데 ‘고함치려고 그러느냐’는 이례적인 답장이 왔다. 조는 (글 때문에) 질책을 당할 거라고 여긴 것 같았다. ‘나는 학생에게 고함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을 보냈다. 10월 19일 첫 면담을 했는데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깊숙이 쓴 채 소파에 앉아 미동도 없었다. 뭘 물어보면 10∼20초 지나서 속삭이듯 짧게 답했다.”
―정신과 상담을 수차례 권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정신 질병 관련 상담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켰다.”
사건 후 수사결과에 따르면 조는 여학생들을 스토킹한 것 때문에 정신과 진찰을 받았고 치료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방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로이 교수는 책에서 “한번은 조와 단둘이 앉았는데 눈빛에 증오가 가득 차 있어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나한테 화난 게 있니’라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고 회고했다.
―조가 이민자였다는 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나 역시 이민자다. 어느 날 타향에서 다른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 향수(鄕愁)에 대해 얘기하자 조는 동의하면서 ‘외롭다’고 했다. 모처럼 반응을 보인 때였다.”
―결국 조의 정신질환이 범행 원인으로 밝혀졌지만 사건 직후 한국사회 일각에선 이민자의 부적응, 구조적 소외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조는 우울증과 선택적 함묵증(緘默症)을 앓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세 살 때부터 증세가 있었다고 하니 20여 년을 상대적 침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면 대처하기 어렵다. 더구나 주변에서 소외됐다고 느끼는 사람은 가벼운 일에도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민자라는 점이 총기 난사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역사를 보면 범인의 대부분은 백인 미국인이다. 종종 그들도 자신이 희생자라고 말한다.”
―조가 한국 출신이란 점 때문에 사건 직후 한국 사회에선 우려가 있었다.
“조는 우연히 한국 출신일 뿐이었다. 국적이나 인종적 배경이 그 인물의 폭력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는 건 터무니없음을 다들 알고 있다.”
―당신이 겪은 정신적 상처는 어떻게 극복해 왔나.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하고 격려해 준 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당시 한국인이 우리와 슬픔을 같이한 사실은 매우 큰 힘이 됐다. 한국인은 위대한 동정심을 보여 줬다.”
―책에서 학교 당국의 부적절한 대응을 과감히 비판했다.
“우리가 그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이런 종류의 사건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문제 학생에게는 도움이 필요한지 알아보고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개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심각하게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도덕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기에 도움을 주는 게 절실하다.”
“학교에 밉보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매우 도전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동료 교수, 학생들이 많이 지지해 준다”며 웃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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