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론/김성호]오바마 시대<1>美변화 앞엔 좌우 없다

  • 입력 2008년 11월 6일 02시 58분


미국 대선이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다.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 230여 년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그 함의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빌려 이미 짚어둔 바 있으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9월 1일자 동아광장 ‘오바마, 미국 민주주의의 힘’).

혼란 수습할 ‘소통의 지도자’ 환영

세계사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백인들의 서양사에 유색인이 유력 정치 지도자로 등장한 사례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상상력이 창조해 낸 르네상스 베네치아의 사이프러스 총독 오셀로 정도 아니었을까.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에 의해 구축된 근현대라는 시공간을 주도하는 세계 최대 강국. 그 대통령에 흑인이 선출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세계사적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허나 거대담론을 잠시 접고 좀 차분한 숨으로 돌아볼 때 오바마의 당선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짧게는 소(小) 부시 8년, 길게는 레이건 집권 이후 거의 30년간 미국을 지배해온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고삐 풀린 시장의 방종, 금융자본의 자기파괴적 탐욕, 보수적 가치정치의 위선과 기만, 안보 우선주의의 폭력성, 그리고 일방 외교의 오만함에 대한 국민적 자성과 평가를 담고 있다. 주기적인 정권교체를 넘어 미국의 국가전략 패러다임 자체가 변곡점에 다다른 것이다.

이런 시점에 오바마가 당선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전환에 따른 사회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불안을 보듬으며 고통분담에 필요한 인내심을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의 대국민 소통능력이 끽긴하다. ‘위대한 소통자’ 오바마의 당선을 보며 안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대전환기 대통령에게 소통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대안적 패러다임의 창출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 궁극적인 목표는 추한 면모를 만천하에 드러낸 미국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되찾는 데 있다. 오바마가 꿈꾸는 ‘담대한 희망’의 지향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볼 때 백악관은 물론 상하 양원까지 장악한 민주당 지도부에 얼마나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한 예로 상위 5%에 대한 증세를 통한 95%에 대한 감세라는 경제정책은 선거공약 치고도 너무 얄팍했다. 대전환기에 걸맞은 고민은 얄궂은 세금논쟁을 넘어, 국가와 사회와 시장의 새로운 관계설정, 그를 통해 신자유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인간다운 삶을 복원하는 데 맞춰져야 했을 터이다.

그런 심모원려의 선례가 없지도 않다. 대공황기 루스벨트가 1932년 취임하자마자 ‘뉴딜혁명’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케인스주의라는 새로운 국가 재건 설계도가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집권한 레이건의 ‘보수혁명’ 뒤에도 진보의 전성기 196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의 머릿속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던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있었다. 이에 반해 2008년의 민주당에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나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학에 필적할 스케일의 밑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혁명적 전환기 미국을 이끌어갈 청사진이 이번 대선에서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뚜렷한 정치-경제 밑그림 안보여

흑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사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쾌거다. 또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미국인 다수는 물론 많은 세계인이 절실히 공감하고 있다. 그 ‘담대한 희망’을 ‘믿을 수 있는 변화’로 바꾸어 놓을 큰 그림이 아직 눈에 안 들어와 아쉬워하는 건 오바마에게 거는 기대 수준이 너무 높은 탓일까. 그래도 일단은 오바마 당선인에게 축하와 함께 신뢰를 보낸다. 이제껏 보여준 그 깊은 속과 밝은 눈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오바마 당선에 대한 당장의 평가는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에 변화가 왔다.’ 우리에게도 곧 불어닥칠 그 바람 앞엔 여야도 좌우도 없다. 미국의 대전환이 대한민국의 대혼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모두 함께 깨어있어야 한다.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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