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도 바꿔” 오바마 세대 반기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 세대 따라 지지후보 갈린 美 민주경선

“보혁떠나 기성 정치인은 싫다” 新舊 교체바람 거세

Y세대, 비주류 대통령 거부감 없어… “美역사 새장”

《"이민자여서 그런지 우리 가정은 확고한 민주당 지지예요. 하지만 가족 내에선 힐러리와 오바마 지지가 확연히 갈려요. 저하고 집사람은 힐러리인데, 아이들은 무조건 오바마예요."

미국 버지니아 주 라우든 카운티에 사는 박순석(48) 씨 가족은 5개월째 전개되는 민주당 경선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지지로 나뉘어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대학에 다니는 큰딸은 석 달 전쯤 메릴랜드에서 오바마 의원의 유세가 열리니까 친구들과 함께 차편을 구해서 단체로 몰려가더군요.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리고 난리였어요."

세대에 따라 지지 후보가 갈린 건 박 씨 가족만이 아니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는 '오바마 대(對) 힐러리' 드라마는 민주당 지지자들 간에도 인종, 교육수준, 직업, 지역별로 뚜렷하게 지지세가 나뉨을 보여줬다. 이 중 지지 후보를 가장 명확히 가른 변수는 '세대'였다.

나라의 방향을 가늠하는 선거전이 신구(新舊)세대간의 격돌 양상을 띠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비슷한 이념적 지향성을 띠는 민주당 지지자들 내부에서 이처럼 세대 대결 양상이 뚜렷이 빚어진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으로 분석된다.》

▽리버럴 내부 세대 대결= 오바마 의원이 사실상 후보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젊은층의 열렬한 지지와 그 지지가 실제 투표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그래픽 참조)

이번 경선에서 30대 이하 투표 참가자는 과거의 두 배, 일부 지역에선 세 배에 달했다.

오바마 의원이 압승을 거둔 조지아는 평균연령이 28세였다. 반면 힐러리 의원이 승리한 펜실베이니아는 평균연령이 40세였다.

세대 간 지지세 갈림 현상은 흑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종에서 나타났다.

오바마 의원 유세장에서 만난 히스패닉계 대학원생 에밀리 루이스 씨는 "부모님은 '클린턴 가문은 히스패닉의 친구'라고 말하지만 나는 페이스북(인터넷 친구 맺기 사이트)에서 오바마 지지 모임에 가입하고 인터넷 기부금도 냈다"고 말했다.

오바마 의원도 진작부터 젊은층을 결집하고 끌어내는 전략에 집중했다.

지난해 출마 연설 때 그는 '세대'란 단어를 13번이나 써 가며 "어느 시대나 새로운 세대를 부르는 시대적 요청이 생긴다. 오늘 우리는 그런 부름을 받고 있다"며 세대교체를 강조했다.

그는 대중 연설 때마다 구체적인 공약 보다는 막연하지만 감성에 호소하는 '희망', '통합'을 강조했다. 긴 문장 보다는 단문들을 끊어가며 관계대명사로 이어가는 어법을 통해 젊은이들의 호흡에 맞췄다. '우리'란 단어를 특히 많이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더불어 페이스북 등 웹상 지지 네트워크 구축, 거의 매일 보내는 이메일 편지 등을 인터넷 세대를 공략했다.

▽베이비붐 세대 VS 자녀세대=통상 미국의 성인들을 △전쟁 경험 세대(1945년 이전 출생) △베이비붐 세대(1945~60년 출생) △X세대(1961~70년대 중반 출생) △Y세대(1970년대 중반~94년 출생·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번 민주당 경선은 베이비붐 세대(힐러리 1947년생)와 X세대(오바마 1961년생) 후보를 놓고 베이비붐 및 그 이전 세대와 자녀세대가 세를 겨룬 셈이다.

물론 민주당 내 신구 세대 대결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윌리엄 걸스턴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2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1983년 게리 하트 후보가 '뉴 아이디어'를 표방하고 나섰을 때 노년층이 많은 월터 먼데일 후보 지지자들과 세대 간 대결 양상이 벌어진 전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 민주당 간부는 "민주당이라고 해도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며 "박빙승부가 이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세대간 분리가 더 깊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번처럼 젊은층이 대거 열성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테리 마돈나 플랭클린앤드마셜대 정치연구소 소장은 "젊은층은 지난 40년간 로널드 레이건 시절을 제외하곤 대체로 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였다"며 "흑인이나 여성 후보가 이렇게까지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적은 없었다. 미국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세대 대결의 사회학= 전문가들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해 비난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틀어 기성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물론 핵심 원인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정(失政)이 제공했다. 특히 이라크전쟁의 실패가 '바꿔야 한다'는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젊은층에겐 기성 워싱턴 정치 전체가 실망스런 존재였고 부시 대통령에게 시종일관 각을 세워온 힐러리 의원마저도 교체 대상인 낡은 세대로 여겨진 것이다.

이는 2002년 한국 대선 때 '노무현-정몽준' 연대라는 새로운 얼굴에 젊은층이 몰렸던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 젊은층엔 이념적 경도 현상이 상대적으로 적다., 1970년대 히피 현상과 달리 미국적 가치에 대한 존중도 강하다.

오바마 의원 유세장에서 만난 앤드류 루이스(메릴랜드대 4학년) 씨는 "기성세대가 미국을 최고 강국으로 키우고 유지해 온 업적들을 존중한다"며 "오바마 의원은 과거의 아웃사이더 지도자들과 달리 정제되고 품위있는 이미지를 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한편 S대의 한 교수는 '브래들리 효과'를 들어 설명했다. 이는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당시 흑인인 톰 브래들리 후보가 여론조사에선 앞섰지만 막상 투표에선 진 데서 유래한 용어다.

인종 문제의 민감성 때문에 익명을 요청한 이 교수는 "민주당 지지자들 내에서 연령이 올라갈수록 인종적 요인 때문에 오바마 의원 지지자가 줄어들고 인종에 대한 선입견이 적은 젊은층일수록 오바마 의원 지지자가 많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브루킹스 연구소 걸스턴 선임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힐러리는 중장년층에게 잘 알려진 정치인이며 그들은 빌 클린턴 시절의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당시의 미국 사회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힐러리를 지지했다. 반면 오바마 의원은 선거의 테마가 '세대교체'이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는 것이다. 지난 40년간 분열의 정치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메시지가 젊은층을 결집시켰다."

걸스턴 선임연구원은 또 "젊은 유권자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이전 세대가 겪은 미국보다 인종적으로 다변화된 사회에서 커왔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는 학교에서 여러 대륙 출신 이민자 2세, 3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다인종, 다문화적인 상황에 익숙해 졌다. 다인종, 다문화적인 상황이 노년층에게는 거북한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몰라도 젊은층에게는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민주당 성향의 그런 젊은층에게 오바마 후보는 다인종, 다민족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후보로 자리 매김 했다."

▽본선 세대 대결 전망= 72세인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와 47세인 오바마 후보 간의 본선 대결에서 힐러리 의원을 지지했던 장년, 노년층은 어떤 선택을 할까.

걸스턴 연구원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후보자 간 연령차가 큰 선거다. '민주당 성향의 신구 세대가 하나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반면 마돈나 교수는 "민주당 사람들은 그대로 민주당 지지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고 지지 정당을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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