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해야할 쪽은 오히려 미국인데”

  • 입력 2007년 4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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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언론이, 美 시민이 ‘한국에 보내는 편지’

■필라델피아 유력지 사설 “한국 사과에서 교훈얻어”

미국 필라델피아의 유력 일간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은 한국인의 잘못이 아니며 잘못이 있다면 이민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국에 있다고 지적했다.

인콰이어러는 20일자 ‘한국에 보내는 편지-당신들의 사과에 담긴 교훈’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제발 사과를 멈춰 달라.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요약.

“당신들이 당신 나라 출신 이민자가 저지른 범죄와 그로 인한 죽음에 비탄해하는 것은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당신들은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어 주었고 대통령이 세 차례나 충격을 표시했다. 하지만 용의자는 미국에 어릴 때 와서 여기서 자랐다. 어쩌면 우리가 그를 더 잘 돌보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미국 내 한인들에게 역작용이 있을 것이라 걱정하는 데 대해선 실망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미국이 그보다는 나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9·11테러 직후 일부 무지한 사람이 미국 내 시크교도들이 쓰고 있는 터번만 보고 알 카에다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믿음에서 그들을 공격한 걸 기억한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국제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들의 사과가 불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신의 은총과 인간성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대답은 당신들이 행동으로 가르치는 바를 배우겠다는 것이다. 우리 미국인들은 집단적으로 행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들을 인정하길 꺼려 왔다. 노예제도, 소수 민족 차별…. 제2차 세계대전 때 재미 일본인들을 감금한 것에 대해선 사과했지만, 사과를 하지 않은 일이 훨씬 더 많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와 기업 경영자들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과를 더 엉망으로 만들곤 한다.

솔직히 그들이 표시한 유감 가운데 상당수는 나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토크쇼 이슈에서 빠지게 만들려는 진지하지 않은 광고에 불과했다. 미국 사회에선 한국인 당신들을 포함한 다른 문화권과는 달리 진정 부끄러움을 느껴 사임한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젊고 아직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좋은 본보기를 보여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화보]버지니아 캠퍼스 '조승희' 애도 추도석 마련

■제자잃은 버지니아공대 강사 본보 기자에 e메일 보내와

미국 버지니아공대 시간강사인 제러미 개릿 씨는 이번 참극으로 제자인 중국계 미국인 헨리 리 씨를 잃었다. 19일 밤 취재 현장에서 마주쳤던 개릿 씨가 이튿날인 20일 “한국인이 미안해할 필요 없다. (외국인인) 조승희는 손님(guest)이었고, 주인(host)인 학교, 커뮤니티, 제도가 진작부터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줬어야 했다. 사과해야 할 쪽은 미국”이라는 내용의 e메일을 보내 왔다.

그는 “신라 왕조를 따서 이름이 셰일라(Sheilla)인 내 약혼녀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며 한국인의 고통 치유에 관심을 보였다. 다음은 그의 글을 일부 요약한 것.

“나는 한국인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이번 총기 난사 사건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었다. 한국인은 사과 대신 모든 고통과 손실을 미국인과 함께 아파하면 된다. 이곳의 누구도 한국과 한국인을 책망하지 않았다.

따지자면 사과해야 할 쪽은 미국이다. 한국인은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사건 후) 미국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조승희는 손님이었고, 주인인 미국의 학교, 커뮤니티, 제도가 그에게 진작부터 도움을 줬어야 했다. 그는 ‘호키’(Hokie·칠면조와 비슷한 상상의 새로 버지니아공대의 마스코트)였고, 우리 커뮤니티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조승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그의 인종과 문화적 배경이 이 상황에 약간의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조승희의 국적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아시아계라는 점 때문에 우리 커뮤니티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정서적 지원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영어에 외국인 억양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를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친구들이 그를 도우려는 시도를 덜 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미국에서 태어난 학생들도 겪는 일이므로 이번 사건은 인종, 문화적 배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버지니아공대에서 한국인의 존재감은 크다. 2년 전 대학신문(Collegiate Times)의 표지기사로 밴드부에서 활동하던 한국 유학생이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참극 이후 인터넷 가동이 중단되는 바람에 정확히 찾을 수 없지만, 당시 기사의 제목은 ‘Country Music Has Lost its Seoul(컨트리 음악이 서울사람·영혼을 잃었다)’였던 것 같다. (편집자 주-영혼·Soul과 서울·Seoul의 발음이 같은 것에 착안한 것)

블랙스버그=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화보]버지니아 캠퍼스 '조승희' 애도 추도석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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