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 美이민… 세탁소 일하며 자녀교육 헌신

  • 입력 2007년 4월 19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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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승희 씨 가족은

이웃 “넉넉하진 않지만 조용하고 단정한 사람들”

사건 직후 부모 자살 소문도… 美경찰서 보호중

누나는 프린스턴大졸업후 뉴욕서 직장 다녀

총기 난사 사건 용의자 조승희 씨를 향한 분노,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처절한 아픔과는 별개로 그의 부모가 받았을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도 미국 교민 사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18일 미국 교민 사이에선 충격을 못 이긴 조 씨의 부모가 자살을 기도해 아버지(62)는 숨지고 어머니(56)는 중태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권태면 워싱턴 총영사는 18일 “미국 경찰이 이들의 신병을 확보해 조사 중”이라며 “전혀 사실이 아님을 미국 측이 확인했다”고 소문을 일축했다.

본보 취재 결과 조 씨의 부모는 한국에서 가난하게 살다 1992년 미국에 이민 와 고생을 하면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은 워싱턴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론 남의 세탁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힘들게 살아 왔던 것으로 파악된다.

2002∼2005년 자신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조 씨의 어머니 김모 씨를 고용했던 양모 씨는 18일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조 씨(미국에선 남편의 성을 따라 아내를 부름)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아이들 학비도 융자를 받아 내는 것 같았고 그들이 원하는 것만큼 아이들 뒷바라지를 못해서 안타깝다고 종종 말했다”고 전했다.

“조 씨는 주로 웃옷을 다리는 일을 했다. 남편이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서 허리를 다쳤다고 들었다. 이민 온 직후부터 세탁소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가족 이야기를 종종했는데 ‘딸은 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적극적이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 칭찬을 무척 많이 듣는다’고 하더라. 아들은 누나보다는 공부를 못했지만 버지니아공대에 들어가자 부모가 좋아했다. 방학 시작할 때와 끝날 때는 아들을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와야 한다며 휴가를 냈다. 매우 가정적인 어머니였다.”

먼저 이민 온 형제 누이들을 따라 이민 온 조 씨는 한인 커뮤니티에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기에 문제가 있는 가정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양 씨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아이들의 졸업식이나 방학 때는 꼭 부부가 같이 학교를 방문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했지만 남편이나 아이를 원망한 적도 없었다. 애들이 말썽을 부린다, 공부를 너무 못한다, 문제가 많다는 식의 이야기도 전혀 하지 않았다. 2005년에 손이 아프다며 일을 그만뒀다. 한국에선 이런 일을 하지 않다가 이민 온 뒤부터 하니 익숙지 않았던 것 같다.”

양 씨는 “조 씨는 조용하고 차분한 전형적인 한국형 여성이었다”며 “그런 어머니에게서 어떻게 그런 아들이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정말 놀랍다”고 말했다.

센터빌의 조 씨 집 이웃에 사는 마셜 메인 씨는 기자에게 “부부가 가끔 일을 나가는 것 같았는데 조용하고 단정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조 씨 가족은 이민을 가기 전엔 서울 도봉구 창동에 살았는데 다가구주택 여러 곳을 이사 다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 씨의 부친은 당시 헌책방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이민 가기 전 마지막으로 살았던 창동 다가구주택의 주인 임모(67·여) 씨는 “아들(조승희)은 얌전하고 조용했던 아이로 기억된다”고 전했다. 이들은 당시 3층짜리 다가구주택 중 방 2개가 딸린 반지하 집에서 월세로 살았다.

임 씨는 “갑자기 이사를 가겠다고 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 미국으로 간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일각에선 조승희 씨의 범행을 교육 이민이나 지나친 교육열이 부른 부작용 때문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누나를 보면 그런 시각은 ‘비정상적 정신상태를 지닌 개인의 문제’를 지나치게 사회구조, 가정환경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조 씨의 누나(26)는 2004년 명문 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린스턴대 재학생들은 18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한인 학생회에는 별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지만 봉사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인 성실한 학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2003년 발간된 프린스턴대 학보에는 조 씨의 누나가 미 국무부의 인턴십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노동조건을 현지 조사한 경험담이 소개돼 있다. 미얀마 이주민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가슴 아파하고 이국적인 문물에 빠져 본 즐거운 경험을 소개한 글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다운 밝음이 넘친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한국의 조씨 외가 큰 충격

“뉴스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유족들과 나라에 죄송할 뿐”

“늘 가족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나라에 죄송할 뿐입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용의자인 조승희(23) 씨의 외가 쪽 가족은 큰 충격 속에 “사건 희생자들의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전했다.

경기 고양시 외곽의 허름한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거주하고 있는 조 씨의 외조부 김모(81) 씨는 18일 본보 기자를 만나 “승희가 어릴 때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아 부모 속을 무척 썩였지만 얌전했다”면서 “자식을 잘못 키운 죄를 어찌 갚아야 할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먹고살기 힘들어 먼 남의 나라까지 가서 험한 일을 한 부모를 생각하면 그 녀석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 씨는 “아내와 사별한 뒤 성당에 나가 늘 기도하며 위안을 삼았는데 이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 씨 가족은 이민을 간 이후 외가 쪽과 연락을 끊다시피 해 이들은 조 씨 가족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김 씨는 “뉴스를 본 뒤에야 딸이 5년 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승희가 대학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조 씨의 큰외삼촌인 김모(53) 씨는 이날 본보와의 통화에서 “명절 때 가끔 전화가 왔지만 안부만 묻고 끊어 어떻게 사는지, 애들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며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은 지난해 추석 때”라고 말했다.

그는 “서로 바쁘고 먹고살기 힘들어 누나(조 씨의 모친) 가족이 한국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우리도 미국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서 “사건 희생자들을 위해 자숙하며 지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며 탄식했다.

김 씨는 “1992년 이민을 가기 전 누나를 한 번 만났는데 ‘애들 교육 때문에 이민을 간다’고 하더라”며 “이민을 간 뒤로는 15년 가까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건 이후 뉴스를 보고도 긴가민가했다가 매형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매형 집안은 일찍 이민을 가 우리 집안과 거의 유대관계가 없었다”며 “누나 전화번호도 몰라 답답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조 씨의 이모(49)도 이날 본보 기자를 만나 “이민을 간 것도 떠난 뒤에 엄마에게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알 정도로 친정 식구 간에도 교류가 별로 없었다”며 “조카들은 아주 어렸을 때 봤을 뿐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어 사진을 보고도 조카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8년 전 엄마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 언니가 연락을 받고도 오지 않아 서운했다”며 “언니도 살기 팍팍해 연락을 잘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형부(조 씨의 부친)도 말수가 적고 과묵했다”며 “언니 시댁 쪽 가족이 미국에 있어 초청을 받아 이민을 간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고양=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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