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기숙사 뒤져 헤어진 여자친구 찾아낸뒤 사살"

  • 입력 2007년 4월 17일 19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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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총격 사건이 끊이지 않는 미국이지만 32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를 또 한번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미국인들은 1999년 고교생 2명이 동료 학생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로라도 주 콜럼바인 고교 총기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며 "콜럼바인의 대학 버전"이라고 경악했다.

이번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대량 학살'로 불릴 정도로 피해 규모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17일 '콜럼바인 사건 8년 후'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번 사건은 미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가장 큰 위험이 마음만 먹으면 너무도 쉽게 무장할 수 있는 국내 살인자들로부터 온다는 끔찍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고 논평했다.

▽끊임없는 교내 총기난사 사건, 불안한 미국 시민들=교내 총기 사건의 비극은 유치원이나 대학과 같은 평온한 일상을 파괴하는 위협이 너무나 가깝게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불행을 막아낼 방도가 없다는 무력감에서 온다. 학교는 개방된 장소이기 때문에 철저한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버지니아텍은 2600에이커(약 320만 평)가 넘는 대지에 건물도 100여 채이고 2만6000명의 학생들이 생활한다. 1966년에는 텍사스 오스틴 대학 구내에서 총기 난사로 16명이 죽고 31명이 다쳤다. 2000년 이후 발생한 교내 총기 사건은 9건으로 한해 한 건이 넘는다.

제네바 해리스 씨는 뉴욕타임스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버지니아텍은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며 "앞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고 탄식했다.

스티브 헌트 씨는 "더 큰 비극은 이 같은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라며 "왜 선량한 학생들이 총기 소유 허용 법을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희생돼야 하느냐"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학교는 안전하고 범죄가 없는 배움의 전당이 돼야 한다"며 "이처럼 끔찍한 범죄가 발생해 미국의 모든 교실과 온 사회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 하원은 낸시 펠로시 의장 주재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묵념을 했다.

▽대학과 경찰의 대응, 적절했나=사건 발생 직후 대학의 초기 대응이 너무나 허술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학교 측은 오전 7시15분 기숙사에서의 첫 번째 총격 이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약 2시간 후 이메일로 학생들에게 사건을 알렸다. 하지만 이 시간쯤 범인은 이미 노리스홀 강의실로 이동했고 9시45분 2차 범행을 개시했다. 1차 범행의 피해자는 2명인 반면 2차 범행의 피해자는 30명이어서 늑장 대응의 폐해는 더욱 컸다. 총격사건을 알리는 교내 방송은 9시55분, 강의 취소는 10시16분에야 이뤄졌다.

CNN에 따르면 이 대학에는 사건 발생 사흘 전인 13일 학교 건물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협박 전화도 걸려왔다.

16일 오후 대학 당국의 기자회견에서 늑장 대응을 추궁하는 질문이 쏟아지자 찰스 스티거 총장은 "기숙사 총격이 외부 침입자가 아닌 내부자 소행이며 범인이 달아난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며 "추가 범행이 이뤄질 것이란 아무런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범인은 아시아계 젊은이?=범인의 신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17일 "범인이 헤어진 여자 친구를 찾아 기숙사를 방마다 뒤졌다"는 학생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기숙사에서 숨진 학생은 에밀리 힐셔라는 여자 신입생과 3학년 남학생 라이언 클락이다. 이 신문은 2차 범행 후 자살한 범인과 힐셔, 클락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시카고 선 타임스는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수사당국은 중국 상하이에서 학생 비자를 받아 지난해 8월 유나이티드 항공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24세 중국인 남성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주 발생한 폭발물 설치 위협은 이 남성이 학교 보안 대응태세를 확인하기 위해 시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참사를 건물 밖에서 담은 동영상이 CNN 등 주요 언론에 소개돼 손수제작물(UCC)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토목공학과 대학원생 자말 알바구티는 노키아 휴대전화 카메라로 20여 발의 총성과 무장 경찰의 현장 접근 모습 등 긴박한 상황을 포착했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테러가 끊이지 않는 고향 중동에서 미국으로 유학 왔을 때는 가장 안전한 나라에서 공부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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