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美대선 제3세력으로 급부상 ‘리버테어리언’은 누구

  • 입력 2007년 2월 10일 02시 54분


“정부가 세금을 걷어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집어치워라. 노후는 각자가 준비할 일이지 정부가 왜 나서나. 낙태? 동성애?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 누가 간섭하나.”

누군가 이렇게 얘기한다면 그저 개인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해야 한다는 분명한 철학과 이념을 갖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이들의 이념적 성향을 ‘리버테어리언(libertarian·자유방임주의자 또는 자유지상주의자)’으로 구분한다. 특히 최근 리버테어리언이 기존 보수 대 진보의 양극 정치구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제3의 정치세력으로 부상한다는 분석이 나와 주목된다.

○ 보수-진보 이분법 시대는 끝났다

흔히 보수주의는 △경제적으로 낮은 세금과 지출 억제 등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사회적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강조하는 반면, 진보주의는 △경제적으로 정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사회적으론 개인 자유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이들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는 각각 공화당(빨간색)과 민주당(파란색)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리버테어리언은 △경제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 우파에 가깝지만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자유 극대화를 추구하는 진보 좌파에 가깝다. 이념적으로 보라색 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들 리버테어리언은 경제적으론 낮은 세금과 정부 지출 억제, 자유무역주의, 사적(私的) 사회보장제도를 지지하며 사회적으론 낙태 선택권을 존중하고 이민자와 동성애자에게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일례로 동성애자 결혼 논란과 관련해 보수 우파는 금지를, 진보 좌파는 허용을 주장하지만 리버테어리언은 당사자 간의 계약인 결혼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자체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 보이지 않는 정치세력

리버테어리언 그룹은 개인주의적 성향만큼이나 조직화되지 않아 흔히 무시되기 일쑤다. 정당 조직이 변변치 않음은 물론이고 보수 세력의 복음주의 교회나 기독교연합, 진보 세력의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와 비교할 만한 조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버테어리언 이념을 모토로 내건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는 최근 ‘폴리시 리포트’에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해 리버테어리언 유권자들의 세력화 가능성을 점검했다.

2006년 갤럽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21%가 경제적 이슈에선 보수적 성향을, 개인적 자유에 대해선 진보적 성향을 보이는 리버테어리언으로 나타났다. 보수(conservative) 성향은 25%, 진보(liberal) 성향은 21%, 포퓰리즘 또는 국가주의 성향은 20%로 나왔다. 숫자로만 보면 리버테어리언이 보수나 진보에 맞먹는 세력인 것이다.

퓨리서치센터와 미국선거연구(ANE)의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14%, 13%가 각각 리버테어리언 성향으로 분류됐다.

○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다음엔?

이 보고서는 특히 리버테어리언 유권자들이 최근 몇 년 동안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갈린 미국 정치판에서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최대 무당파인 ‘스윙 보터(swing voter·부동표 유권자)’ 블록을 형성했다고 지적했다.

리버테어리언은 지금까지 대체로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했다. 애덤 스미스, 존 로크의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을 강조하는 리버테어리언 이념에 공화당의 감세 정책이나 총기 규제 반대 정책이 맞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의 표가 점차 민주당 쪽으로 옮겨 가는 추세다.

리버테어리언 유권자들은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에게 각각 72%, 20%의 표를 던져 압도적인 공화당 지지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2004년엔 부시 후보와 존 케리 후보를 각각 59%, 37% 지지해 그 차가 크게 줄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도 리버테어리언 유권자는 공화당에 59%, 민주당에 36%의 표를 던진 것으로 조그비 여론조사 결과 나타났다. 케이토연구소의 자체 분석에서도 공화당은 2002년 리버테어리언 유권자에게서 550만 표를 얻었지만 2006년엔 290만 표에 그쳤다.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난 이유로는 공화당 정부의 과잉 지출, 도청 등 시민자유 침해, 이라크전쟁 비용 급증이 주원인으로 꼽혔다. 공화당의 큰 정부 정책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 리버테어리언과 X세대

케이토연구소는 지난해 10월 ‘리버테어리언 유권자’라는 보고서에서 리버테어리언 그룹의 부상이 ‘베이비 부머’(제2차 세계대전 후 출산율 급상승기에 태어난 세대)에 이은 ‘X세대’(1960년대 후반부터 1970, 80년대에 태어난 세대)의 성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분석했다.

베이비 부머 세대는 1960년대 반전시위 열풍을 경험했고 1980년대엔 기업 부흥을 가져온 ‘레이건 혁명’을 목격했다. 이런 시대적 분수령을 겪으면서 이들은 문화적 변동 및 개인적 자유에 거부감을 느끼는 보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저항감을 가진 진보로 나뉘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X세대의 경우 개인주의와 세계화를 모두 수용하는 리버테어리언 성향의 이념적 좌표를 갖게 됐다.

따라서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좌파도, 윤리와 종교적 가치를 내세우는 우파도 이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것.

이 보고서는 리버테어리언들이 보수나 진보 그룹보다 상대적으로 젊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고수입 재산가 그룹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교회에도 거의 가지 않는다. 교육 수준이 높은 만큼 투표율도 매우 높다.

○ 내년 대선은 리버테어리언이 좌우?

이 같은 분석 아래 케이토연구소는 “앞으로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주자들은 리버테어리언 유권자 그룹에 어필할 수 있는 공약과 정책을 내놓아야만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주목할 점은 케이토연구소의 장담이 실제로 유력한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테러 용의자의 처리, 정보기관의 도청 문제 등 개인적 자유를 침해하는 문제에 부시 행정부와 대립 각을 세워 왔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역시 감세 및 의료보험 문제에 보수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변화는 기존의 양당구도에서 벗어나 중도적 유권자를 염두에 둔 것이어서 딱히 리버테어리언 유권자만을 겨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력 대선 주자들이 내거는 공약과 정책에 따라 리버테어리언의 표심이 크게 출렁거릴 것임은 분명하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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