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토머스 프리드먼]후세인 교수형과 포드의 장례식

  • 입력 2007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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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0일은 묘한 날이었다. 발단은 사담 후세인의 교수형이었다.

무슬림의 종교행사 ‘이드’ 기간에 이라크의 시아파 지도자들이 서둘러 후세인을 처형장에 끌고 갔다는 뉴스를, 사형집행관들이 ‘무크타다’를 외치면서 그를 조롱하는 장면이 당긴 동영상을 보며 이번 사형 집행은 특정 종족의 복수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BBC 국제부의 존 심프슨이 바그다드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할 만했다.

“18세기 공개처형의 잔재를 연상시키는 추악한 행위였습니다. 후세인 정권하에서도 사형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롱당하고 학대받았습니다. 이곳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일이 후세인의 처형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씁쓸합니다.”

어쨌든 지난 토요일은 묘한 날이었다. 아침에 후세인의 사형 집행 장면을 본 바로 그날 오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TV에서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관이 옮겨지는 중이었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방송되는 그 장면에 나는 목이 메었다. 후세인의 처형이 국가 분열의 단적인 장면이라면 포드의 장례식은 반대로 국가 화합의 장면이었다. 미국의 상처를 보듬어 화합시킨 전직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동지와 적들이 함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이 대를 이어 정치적 규범으로 정착된 나라에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골리앗의 경우(The Case for Goliath)’를 쓴 마이클 맨델바움은 “바탕에 깔린 일체감 덕분에 우리는 특정 이슈들에 대한 분열을 견뎌 낼 수 있다”고 했다. 의견의 차이, 그 ‘다름’을 공적 영역에서 논쟁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화합을 밑바탕으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민주주의의 신념들은 아직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수될 수 있다. 그러나 곧바로 수출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신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을 뿐이다.

특정 종파가 연출한 후세인의 처형은 이라크가 민주주의 가치들을 얼마나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런 가치들이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안전한 사회를 마련해 주지 못한 책임은 미국에 있다. 이라크인도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 후세인의 교수형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사람들이 미국과 가장 가까운 이라크인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후세인은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라크 시아파 리더들이 “우리는 조국이 단결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후세인의 사형 판결을 종신형으로 바꿨다”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라크는 화해의 제스처로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거의 없다. 상대를 죽이는 새로운 방법들로 우리를 놀라게 했을 뿐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바그다드에 더 많은 미군 배치를 원하고 있다. 미군 증파 논의를 들을 때마다 가정생활이 순탄치 못한 부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날 “애를 낳자. 그러면 우리 관계도 다시 끈끈해질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 봤자 소용없다. 바탕에 일체감이 없다면 아이를 낳는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라크 내 주요 집단들이 권력과 자원을 나눠 갖겠다는 의지가 전제돼 있지 않다면 미군을 더 배치한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라크에서 긍정적인 흐름이 싹틀 때, 그 흐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시간 벌기 차원에서만 미군 증파는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흐름을 찾아낼 수가 없다.

후세인의 처형이 보여 주듯이 이라크는 그들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그 길에서 빠져나올 때가 된 것 같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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