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 40주년]‘文革 파도’ 맞은 청년 후진타오

  • 입력 2006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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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胡錦濤·사진) 중국 국가주석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종결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왜 재평가에 주저하고 있을까.

덩샤오핑(鄧小平)은 1981년 “문혁이 극좌적 오류였다”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20∼30년 뒤에는 총결산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 시기가 됐지만 후 주석은 자신을 ‘황태자’로 점지해 준 덩샤오핑의 지침을 거스르고 있는 셈이다.

많은 분석가는 해답을 후 주석의 문혁 초기 경험에서 찾는다.

17세의 나이로 칭화(淸華)대에 입학해 체육을 제외하고는 전 과목 만점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대부분의 동료가 시골 현장에 배치된 데 비해 대학의 정치지도원으로 남았다 문혁 초기의 혼란에 휩쓸리고 만다. 이후 그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문혁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1966년 6월 문혁 초기 그는 전도양양한 대학 졸업생이었다. 공산당원이 됐고, 대학 동창인 미래의 아내 류융칭(劉永淸)과 약혼도 했다. 게다가 장래가 보장되는 정치지도원으로 대학에 남았다. 당연히 전문교육을 중시하는 장난샹(張南翔) 당시 총장의 노선을 지지하고 학교 조직을 옹호하는 편에 있었다.

칭화대에도 문혁 바람이 불자 그는 학교 조직을 ‘반당(反黨) 집단’이라고 비판하는 학생들에 맞서 장 총장의 노선을 지지하는 대자보를 직접 학내 게시판에 붙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류사오치(劉少奇) 당시 국가주석이 파견한 공작조가 학교를 접수하면서 그는 조사를 받고 개조 대상으로 분류된다. 기존 학교 조직이 학생들의 ‘반란’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공정화학학부의 콰이다푸(괴大富)라는 학생이 문혁 지지 단식투쟁을 하면서 학내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콰이는 하루아침에 문혁의 기수가 됐고 칭화대도 문혁파의 수중에 들어갔다.

“공을 세워 속죄하라(입공속죄·立功贖罪)”는 류사오치 공작조의 지시에 따라 극좌 학생들을 비판하던 후 주석 역시 하루아침에 ‘보황파(保皇派)’가 되고 만다. 보황파란 류사오치의 주자파(走資派)를 옹호하는 사람이나 조직이란 뜻으로 홍위병들이 갖다 붙인 이름.

후 주석은 결국 화장실 등을 청소하는 노동개조대로 보내졌다. 불과 2개월 남짓이지만 사상과 기술을 겸비한 핵심 당원이 한순간에 최하층 육체노동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 후 그는 문혁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

후 주석과 달리 베이징지질대 대학원에 다니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별다른 시련을 겪지 않고 1968년 6월 졸업하자마자 간쑤 성 지질국 지질역학구역 측량대 기술원으로 배치됐다.

칭화대 무선전전자학(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1967년 6월 졸업한 뒤 상하이(上海) 전자관이라는 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으며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 등 다른 4세대 지도자들도 비슷한 하방(下放) 과정을 밟았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제4세대 지도부의 문화대혁명 당시 직책
이름현 직책(2006년)당시 직책(1966년)
후진타오(胡錦濤)당 총서기, 국가주석, 군사중앙위 주석칭화대 정치지도원
우방궈(吳邦國)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칭화대 무선전전자학과 학생
원자바오(溫家寶)국무원 총리지질대 대학원생
자칭린(賈慶林)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제1기계부 플랜트총국 기술원
쩡칭훙(曾慶紅)국가부주석제7기계공업부 기술원
황쥐(黃菊)국무원 부총리상하이 인조판기기창 기술원
우관정(吳官正)기율검사위원회 서기칭화대 동력과 대학원생
리창춘(李長春)정치국 상무위원하얼빈공대 전기과 학생
뤄간(羅幹)중앙정법위원회 주석제1기계부 기계과학연구원 조장
자료: 신화왕(新華網)

■ 대재앙 文革

문화대혁명은 1965년 상하이 시 당위원회 정책연구실의 연구원이었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베이징 시 부시장 우한(吳함)이 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해서파관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를 우회적으로 옹호하는 내용이라는 공격이었다. 그 결과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鄧小平),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 등이 수정주의자 또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실각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는 이어 1996년 5월 16일 ‘5·16통지’를 채택했다. “반드시 당과 정부, 군과 문화의 각 영역에 잠입해 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 인물을 동시에 비판해 그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라”는 문혁 전면 개시 선언이었다.

마오는 군을 장악하는 한편 학생들로 홍위병을 조직해 수많은 지식인을 숙청하거나 하방(下放)했다. 공식 통계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사망자가 1000만 명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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