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크엔드]미국/9·11은 끝나지 않았다

  • 입력 2004년 5월 27일 21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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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 스미스의 '토머스 핀천의 소설-중력의 무지개-각 페이지에서 일어나는 일들'.
2004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 스미스의 '토머스 핀천의 소설-중력의 무지개-각 페이지에서 일어나는 일들'.
미국 뉴욕 소호에서 북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첼시 언저리의 한 건물 옥상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그린 빌보드가 설치돼 있다. 부시 대통령의 눈은 사시로 돼 있고 그 위에 “이 사람이 바로 우리의 대통령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지금 부시 대통령을 바라보는 미 국민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그림이자 혼돈에 처한 미국의 상황을 상징으로 보여 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정체성 잃은 사회.’ 아마도 지금 미국을 대변하는 키워드일 것이다. 그 키워드를 끌어 낸 요인은 물론 9·11테러이고 이라크 죽이기 정책이다. 아직도 미국인들의 입에선 ‘나인 일레븐’이란 말이 우리네 ‘육이오’처럼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 기본으로의 복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 화가는 개인적인 불행에 접하게 된 후 끊임없이 선긋기를 했다고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대개 본질을 반추하고 기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선긋기는 그림 그리기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지금 뉴욕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다. 3월 11일에 시작해 이달 30일 끝맺는 2004 휘트니 비엔날레에는 108명의 예술가들이 참가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미국 예술의 다양성과 새로운 경향을 보여 준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는 이번에도 페인팅, 2D, 설치, 비디오,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전히 9·11테러 이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술가들이 그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전 전시에서 늘 주된 장르로 부각됐던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상당수 줄어들었고 평면에 그린 회화작품이 많아졌다. 달리 말해 기본으로의 복귀, 즉 붓질로 화폭을 채우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 붓질은 상당한 노동력을 요구한다. 수많은 작가가 고행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 고행을 자처한 화가

이번 전시 중 필자의 눈에 가장 띈 작품은 총 775장의 엽서크기의 그림을 완성한 작 스미스의 ‘토머스 핀천의 소설-중력의 무지개-각 페이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수백장의 만화를 그려 놓은, 의미 없는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왜 토머스 핀천을 빌려왔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의도를 읽어 낼 수 있다.

중력의 무지개는 살상용 로켓에서 분출되는 가스가 그리는 둥근 호를 의미한다. 이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패러디인데, 즉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풍자이다. 핀천에 의하면 역사는 거대한 트릭이다. 멸망을 불러온 인자가 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어리로 바뀌었을 뿐임을 이 소설은 암시한다.

‘중력의 무지개’ 매 페이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나름의 영감으로 재구성한 스미스의 작품은 신에게 심판받은 미국 상황에 대한 메타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굳이 난해하기로 소문난 핀천의 소설 중에서도 해체의 징후가 농후한 작품을 택해 그림이라는 장르를 통해 다시 한번 해체를 시도한 것은 정체성을 잃은 사회에 대한 극도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리라. 더구나 775장의 그림 하나하나에 쏟았을 고행의 시간을 생각하면 양피지에 성경구절 하나하나를 옮겨 적던 수도자의 몸짓을 보는 것 같았다.

○ 미국 사회에 대한 참회

버나비 퍼나스는 10대들에게 한창 인기 있는 버추얼 시뮬레이션 게임의 이미지를 빌려 왔다. 작품명 ‘햄버거 힐’은 동명의 할리우드 전쟁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버나비는 이전 같았으면 비디오 아트로 소화했을 이 소재를 화폭에 재현해 냈다. 모니터상의 디지털 콘텐츠(가상의 게임)를 화폭이라는 아날로그 장치에 옮긴 설정 자체가 특이하지만 그는 사람의 몸통이 총탄에 잘려 나가는 상황 하나하나를 붓으로 재현했다.

이는 정치적 정당성은 아랑곳 않고 비디오게임 하듯 전쟁을 즐기는 미국 사회에 대한 참회를 붓으로 고백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를 고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붓질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 미국 예술가들의 머릿속엔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회한과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들은 노스탤지어에 내재한 긍정적인 힘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기 위해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 내공을 쌓고 있다.

뉴욕=김홍탁 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 khong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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