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것저것 배려하다 美교과서 망가진다”

  • 입력 2003년 5월 22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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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읽어주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듣고 있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맥거피 초등학교 학생들. 미국의 보수적인 학부모들과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이 초현실적인 세계를 다룬 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최신작인 ‘해리 포터’는 물론이고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의 고전을 두고도 좌, 우의 입장 차이에 따라 교과서 예문이나 부교재로 적당한가에 관해 논전이 벌어진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교사가 읽어주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듣고 있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맥거피 초등학교 학생들. 미국의 보수적인 학부모들과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이 초현실적인 세계를 다룬 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최신작인 ‘해리 포터’는 물론이고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의 고전을 두고도 좌, 우의 입장 차이에 따라 교과서 예문이나 부교재로 적당한가에 관해 논전이 벌어진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여성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직접 서류 가방을 들고 출근해야 한다.

·남성은 변호사나 의사가 될 수 없다. 아이를 돌보고 있어야 한다.

·노인은 약한 존재가 아니다. 조깅을 하거나 지붕을 고치고 있어야 한다.

·케이크는 몸에 해로운 음식이므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

이 예들은 미국의 교과서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수백 가지 지침 가운데 극히 일부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도가니,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교과서 제작업자들이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하는 금과옥조다. 여성 흑인 소수민족 장애인 등의 정서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내용을 삼가야 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교과서가 현실 세계를 오히려 왜곡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교육사학자인 다이앤 래비치 뉴욕대 교육학 교수는 최근에 출간한 ‘언어 경찰(The Language Police)’에서 미국 초중등학교의 교과서와 시험 예문들이 좌파와 우파로 가치관을 달리하는 집단의 주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바람에 수준이 현격히 떨어지고 현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했다.

● 교과서에서 금기시하는 것들

교과서 출판업체들은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된 지침서를 갖고 있다.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에 대해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을 걸러내기 위해서다. 이 지침서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내부 자료이며 교과서 집필이나 집필 후 심의 과정에서 판단기준으로 활용된다.

지침서 내용은 꽤 구체적이다.

스콧 포어스먼 애디슨 웨슬리사의 지침서는 분량이 161쪽이다. 이에 따르면 여성을 비논리적이고 상냥하다고 묘사하거나 남성을 거칠고 경쟁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1920년 여성은 투표권을 승인받았다”는 표현 대신 “여성은 1920년 투표권을 획득했다”고 해야 한다.

65세 이상의 노인에 대해 언급할 때도 빵을 굽거나 안락의자에 앉아 옛날을 회상하는 모습은 피한다. 노인에 대해 ‘외로운’ ‘병든’ ‘건망증이 심한’ ‘완고한’ 등의 형용사를 쓰는 것도 금지된다. 종교적 관행이나 믿음을 언급하면서 ‘이상한’ ‘괴상한’ ‘원시적인’이라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형용사를 써서는 안 된다.

맥그로 힐사는 29명의 직원과 63명의 컨설턴트가 참여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성차별 관련 집필지침을 정했다. 교과서의 삽화는 남녀의 등장 비율과 역할 비중을 1 대 1로 맞춰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별도의 설명을 곁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그림에는 “20세기 초 여성은 군대의 중요한 보직에서 배제됐다”는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휴튼 미플린사의 지침에 따르면 흑인들을 운동선수나 연예인으로 묘사하는 것, 히스패닉계 미국인을 불법 이민자로 묘사하는 것은 편견으로 간주된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음악 신동이나 졸업식 때 고별사를 읽는 학교 모범생으로 소개하는 것도 금물이다. 아시아계가 소수 민족으로서 성공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 시험문제의 예문도 예외가 아니다

주 단위나 전국 단위의 학력 평가 시험 문제를 출제할 때도 지침서가 있다. 특정 학생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화낼 만한 내용의 예문을 삭제한다.

저자 래비치 교수가 1990년대 후반 초등학교 4학년용 학력평가시험 출제 위원으로 참가했을 때의 일.

문제 가운데 땅콩에 관한 예문이 있었다. 심의위원들은 땅콩을 ‘건강에 좋은’이라고 표현한 대목을 시비했다. 땅콩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학생들에게 편파적이라는 주장이었다.

20세기 초 백인 부호의 후원금을 받아 흑인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 이야기는 백인들에게 우호적인 예문이라는 이유로 삭제됐다.

매킨리산 등정에 성공한 시각 장애인에 관한 예문은 △평지나 바닷가에 사는 학생들이 산간지방 생활에 낯설어 문제를 푸는 데 불리할 수 있고 △일반인들보다 시각 장애인의 산행이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편견이라는 이유로 삭제됐다.

이솝 우화인 ‘여우와 까마귀’를 인용한 예문도 문제였다. 이 우화는 수컷 여우가 치즈를 물고 있는 암컷 까마귀에게 “목소리가 예쁘다”고 칭찬해주자 까마귀가 노래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떨어진 치즈를 여우가 갖고 달아났다는 줄거리. 심의위원들은 여우가 수컷, 까마귀가 암컷인 점에 주목해 △남자는 지능적이고 여자는 남자의 아첨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바보로 묘사한 점 △여성을 외모나 목소리 등에만 신경을 쓰는 것으로 묘사한 점이 성차별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출제위원과 심의위원들은 여우와 까마귀의 성(性)을 바꾸거나 아예 성을 통일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 우파와 좌파의 합작

교과서 출판업체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공개 청문회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주 단위로 공개 청문회를 열어 교과서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갈린 다양한 압력집단들이 청문회에서 자신들의 철학과 배치되는 내용에 대해 맹공을 퍼붓는다.

보수주의자들은 주로 소송을 통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1980년대는 진화론으로 시끄러웠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뿐만 아니라 창조론도 같은 비중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지애나 등 보수적인 일부 주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똑같이 다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각각 과학과 종교로 규정한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87년 7 대 2로 루이지애나주의 법률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983년 테네시주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다른 교과서를 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세속적인 인본주의, 악마주의, 마술, 페미니즘, 진화론, 불복종, 텔레파시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 1988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부모의 종교적 신념과 다른 이념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수정조항 1조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소송을 건 부모들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러 주에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조지 오웰의 ‘1984’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이 신을 모독하거나 성 인종 종교 폭력 문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초중등학생이 보아서는 안 될 금서 목록에 포함됐다.

‘신데렐라’ ‘잭과 콩나무’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들’ ‘미녀와 야수’ ‘헨젤과 그레텔’ 등 동화들도 성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진보적 단체들로부터 공격 받았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책들은 교과서로 채택될 가능성이 낮다. 이 때문에 출판사들은 법적 소송이나 여론 재판에서의 승소 여부에 관계 없이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은 피해왔고 그 전통은 지금의 교과서 제작 관련 지침서로 이어지고 있다.

우파들을 의식해 낙태, 죽음과 질병, 진화론, 아동학대, 실업, 버릇없는 아이들, 무기와 폭력 등에 대한 언급은 피한다. 좌파를 염두에 두고 본문과 삽화에서 성이나 인종차별적 이미지와 언어를 걸러내고, 논란이 되는 명작 대신 무명의 소수 민족 출신 작가가 쓴 무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 과유불급인가

저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교과서의 ‘정치적 올바름’이 상식선을 넘어서면서 특히 문학과 역사 교과서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체적인 맥락이나 작품성과는 관계없이 신을 모독하거나 폭력, 성차별적인 표현이 나온다는 이유로 훌륭한 문학 작품들이 교과서에서 배제된다는 것. 미국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배제하고 문화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다보니 타 민족의 역사 기술을 할 때도 부정적인 면을 외면해 결과적으로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 인식을 갖게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저자는 “학교를 사회와 동떨어진 섬처럼 고립시키는 검열을 중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교과서 심의 과정에서 무엇이 어떤 이유로 배제되는지 일반에 공개하고 주 정부가 아닌 학교나 지역 교육청 단위에서 교과서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예일대 역사학과의 다니엘 케블스 교수는 뉴욕 타임스 서평에서 “래비치 교수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재임 때 교육부 차관을 지냈고 역사와 문학 교과에서 서구적 규범을 강조할 것을 주장해온 사람”이라며 저자의 보수성에 주목한 뒤 “역사 과목에서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해 왜곡이 일어난다는 지적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교과서의 질적인 면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새겨들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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