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수의 바그다드 리포트]"市場에 미사일을 쏘다니…"

  • 입력 2003년 3월 31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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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하던 아이들이, 생필품을 구하러 시장에 나왔던 중년의 남자가, 주방에서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던 여인들이….

느닷없이 날아든 스커트 미사일과 폭격으로 생명을 잃거나 부상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식당에서도 창가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혹시 모를 폭격으로 유리창이라도 깨져 피해를 볼까봐서다.

정확성을 장담했던 미군의 폭격, 하지만 이제 바그다드에서 어느 누구도 이를 믿지 않는다.

오늘(28일)도 바그다드 북쪽에 위치한 알나세르 시장에 폭탄이 떨어졌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시장주변은 아비규환이었다.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자리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부둥켜 않고 오열하고 있었다. 시장주변 집들에서는 여자들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대문을 넘어 흘러나왔다. 아직 수거하지 못한 손, 발 등 신체의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넘쳐나 더 이상 빈자리가 없다. 복도는 다친 어린아이들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10대의 소년들이 각목을 들고 “사담 후세인”을 외쳐된다.

잦은 오폭과 민간인 희생. 바그다드의 민심을 대미(對美) 항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미군의 폭격이 정부건물과 군 시설에 한해 이뤄질 것이라 철저히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폭 현장과 병원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나의 감시자이자 통역자인 아부 무스타파(46)는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취재기자들 사이에서 이름난 수다쟁이인 그가 침묵 속에 차창 너머 검은 연기로 뒤덮인 바그다드의 하늘만을 응시한다.

아침까지만 해도 “미군이 그렇게 폭격을 해대는데도 건물 안에 걸린 사담 후세인 초상화만큼은 떨어지질 않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며 농을 늘어놓던 그다.

무스타파씨는 아내와 두 딸,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바그다드가 고향인 그는 아직 한번도 바그다드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91년 걸프전 때도 바그다드에 머물며 CNN 통역 일을 했고 이번에도 CNN이 추방당하기 전까지 그들의 일을 도왔다.

“이란-이라크전, 걸프전, 미국의 경제 제재…. 지난 20여년간 우리에겐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사는 것에 지친 사람들 중에는 미군이 들어와 후세인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비교적 친미(親美)적 시각을 가졌던 무스타파씨. 그러나 이번 전쟁은 그의 생각을 흔들어 놓았다.

“매일같이 퍼부어 대는 폭격에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아이들은 자다말고 놀라 울고…. 일주일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잠시나마 미국에 기대를 한 내 자신이 한심하다.”

식사도 사양한 채 긴 이야기를 하던 무스타파씨는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바그다드에 미군이 들어온다면 나도 총을 들고 싸우겠다”는 무스타파씨의 이 한마디는 바그다드 민심의 변화를 대변한다. 전쟁이 시작된 후 12일째.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후세인 대통령 주변으로 뭉치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 취재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많은 기자들이 이미 취재비자가 만료된 상태다. 1주일만 잘 버티면 미군의 바그다드 입성을 취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불법으로 체류해 온 기자들 중에는 추방당하거나 감옥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제도 동료기자 2명이 시리아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라크 정부가 취재통제를 위해 제공한 버스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오폭 현장과 병원만을 오가고 있다.

종군기자라는 이름으로 바그다드에 들어와 있는 100여명의 취재기자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고하게 죽어 가는 민간인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뿐이라는 것이 바그다드의 현실이다.

조성수 프리랜서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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