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챙긴 푸틴 여유… “對美 군사대응 능력 충분”

  • 입력 2001년 12월 16일 18시 18분


13일 미국의 일방적인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 탈퇴에 대해 러시아는 당초 예상과 달리 크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예상됐던 일이었고 러시아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 됐다’는 분석까지 일각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미국의 탈퇴 선언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TV성명을 통해 “미국의 결정은 실수”라고 지적한 것이 공식 반응의 전부일 정도로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몇몇 의회지도자들의 대미 비난 발언은 정치적 제스처이거나 해프닝으로 드러났다.

드미트리 로고진 하원 외교위원장은 보복조치로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에서 탈퇴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으나 STARTⅠ은 이미 모두 이행됐고 STARTⅡ는 러 의회의 비준은 받았으나 오히려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한 상황이어서 사실상 탈퇴할 대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ABM협정 붕괴가 러시아의 안보에 별다른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에 성공해도 러시아는 여전히 이를 뚫을 정도로 충분한 수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치연구센터(PIR)의 이반 사프란추크 연구원(핵무기프로젝트팀장)은 “다수의 미사일을 보유하지 못한 중국이나 몇몇 불량국가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탈퇴에 대해 현실적인 대항 방법이 없고 미국의 테러참사 이후 절정에 이른 미-러 관계의 훼손을 피하려는 실리적인 계산도 러시아의 조심스러운 태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여기에 “끝까지 ABM협정을 지키려했다”는 명분과 국제 여론을 얻는 효과를 계산에 넣고 있다. 러시아 외교국방 정책위원회의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전문위원은 일간 네자비시마야가제타와의 회견에서 “앞으로 발생하는 사태에 대해 미국이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다만 러시아는 ABM협정체제 붕괴로 자극받은 중국이 미사일 증강에 나서는 등 군비경쟁이 촉발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과거와 같은 군비경쟁을 벌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이 즉각 미국에 핵탄두를 각각 1500∼2200기까지 줄이고 군축과 관련해 이미 맺어진 기존 합의를 명문화할 것을 제의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