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를 달린다]美中日, 러 극동항구 확보 경쟁

  • 입력 2000년 9월 5일 18시 51분


《러시아 연해주에는 모두 23개의 크고 작은 항구가 있다. 나홋카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보스토치니항도 이 가운데 하나다. 70년 블라디보스토크항과 나홋카항을 보완하기 위해 건설된 보스토치니는 92년부터 미국 등 외국의 자본이 들어오면서 극동의 관문으로 변했다. 러시아 최대 해운사인 극동선사(FESCO)의 이고리 니키포로프 부장은 “보스토치니항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유일하게 현대화된 국제 규모의 컨테이너터미널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연해주 항구의 대부분이 규모가 작거나 시설이 낙후됐다. 이 때문에 미국 일본 중국 등은 유리한 물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 항구를 ‘잡으러’ 나섰다. 외국 자본과 러시아 항구 사이에 짝짓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보스토치니항에 주로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미국은 보스토치니에 연간 400만t의 석유를 보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했다. 시베리아산 석유를 이곳에 보관했다가 태평양을 거쳐 수출하기 위한 것. 인근에는 20㏊ 규모의 러시아―미국 공단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직접 동해로 나갈 길이 없는 중국은 훈춘과 자루비노항 사이에 1477㎞의 복선 철도를 깔아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철도가 연결되면 철도와 해상운송을 연계해 북중국과 미국 일본 사이의 물류가 원활해진다.

자루비노는 부두 4개짜리 조그만 항구지만 러시아 중국 북한이 유엔의 지원으로 두만강 하구를 개발하는 두만강 프로젝트의 핵심 지역이다. 일본도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자루비노 개발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의 나진 선봉지역 때문에 아직은 러시아 항구 투자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과 러시아를 잇는 항로가 열리기는 했으나 요금이 비싸다는 약점이 있다. 현대상선 블라디보스토크 사무소의 서갑식(徐甲植)소장은 “한―러 노선이 한―중 노선에 비해 20ft당 최고 3배까지 비싼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서소장은 “한―러 항로는 특수항로여서 요금이 양국 간 협약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조정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미국 등이 더욱 적극적으로 러시아 극동 항구에 대한 투자에 나설 경우 한국이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가능성도 있다.

현대상선의 서소장은 “외국의 항구 투자와 러시아의 철도 우대 정책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대세가 될 육로 해로 항공을 연계하는 복합운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해운업체도 변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모스크바에 사무소를 내고 사업 영역을 육상으로까지 넓히는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외국의 항구 투자에 맞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지키기 위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TSR 이용을 장려하기 위해 TSR를 이용할 목적으로 극동으로 들어오는 해상 화물의 운임을 낮게 책정하고 있는 것. 예를 들어 부산에서 TSR를 타기 위해 극동으로 들어오는 화물의 운임은 극동이 최종 목적지거나 중국으로 가는 화물 운임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바라노프 러 '극동선사' 부장 인터뷰▼

극동선사(FESCO)는 120년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 최대의 해운업체. 91년 7월 한국과 러시아(당시 소련)가 맺은 해운협정에 의해 한국의 현대상선과 공동으로 한―러 정기화물선을 10여년간 독점적으로 운항하고 있다.

현재 주 1회 ‘카피탄 쿠로프’호가 부산∼보스토치니∼블라디보스토크∼부산을 오간다. 독점사업이기 때문에 다른 노선에 비해 요금이 비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FESCO의 발레리 바라노프 부장은 “독점으로 이익을 챙겼다고 비난하기 전에 그동안 어려울 때도 손해를 감수하면서 노선을 지켜왔다는 점을 평가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동용해운이 6월부터 부산∼아키타(일본)∼포세트를 10일마다 운항하기 시작했고 속초와 자루비노 사이에는 동춘해운이 3주에 한차례 여객선을 띄우는 등 도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바라노프 부장은 부산∼포세트 노선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경유화물만 취급하고 속초∼자루비노 노선은 여객선이어서 아직 한―러정기화물선을 위협하는 적수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기업도 급속히 변화하는 사업환경을 외면하지는 못한다. FESCO는 여전히 정부가 대주주지만 일부 지분을 외국인에게 넘겼다. 5월에는 알렉산드르 루고베츠 새 사장이 취임해 경영진을 대폭 교체했다. 바라노프는 “해운업체는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대주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회사의 입장”이라며 당분간 완전 민영화가 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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