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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4월 4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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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오부치총리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전총리가 1998년 참의원선거에서 참패한 후 자민당을 물려받아 총리에 선출됐다.
오부치총리는 하시모토 전총리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자유당 당수, 하타 쓰토무(羽田牧) 민주당 간사장 등과 함께 구 다케시타(竹下)파의 ‘7공자’로 꼽혀왔으나 별로 두드러지지 못했다. 그가 총리에 선출되자 정계에서는 “자민당내 파벌 사정과 당내 세력균형에 따른 것”이라며 “오부치 본인도 포기했던 총리가 된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취임 직후 금융위기를 넘기고 경기가 좋아지면서 내각지지율이 높아졌다.
또 지난해 초 자유당의 오자와 당수와의 ‘깜짝 합의’로 자민-자유 연립정권을 발족시킨 것도 큰 업적중 하나. 자유당과의 연정으로 주요 법안을 신속히 처리하고 지난해 10월에는 공명당까지 연정에 끌어들여 거대연립여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오부치의 행운은 여기서 끝났다. ‘일본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가’라는 장기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자유당의 연정탈퇴라는 내부문제에 쫓기게 됐다.
▼경제▼
오부치정권 출범직전인 1997년말 홋카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 등 금융기관의 파산이 잇따랐고 취임 당시 일본경제는 5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오부치총리는 ‘경제회생’을 위해 경기회복과 금융시스템 재정비에 주력했다.
금융위기에 60조엔의 공공자금을 투입하는 한편 1998년11월 감세(減稅)를 포함해 20조엔을 크게 웃도는 경제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총 7000억엔 규모의 지역진흥권(상품권)을 발행해 국민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5000억엔 규모의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등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주가가 서서히 상승했고 설비투자가 늘어나는 등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기 회복조짐을 보였다.
▼외교▼
오부치총리는 취임 당시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전 총리 등 거물 정치인들 사이에 끼여 ‘국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재직기간 중 동남아를 중심으로 15번이나 해외순방을 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특히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상호교환방문을 통해 한일문화교류를 촉진키로 함으로써 과거 어느 정권보다도 우호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1998년11월 장쩌민(江澤民)중국국가주석이 1972년 일중(日中) 국교정상화이후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방문했고 오부치총리도 지난해 7월 중국을 답방했다. 오부치총리는 1998년 11월 러시아도 공식방문하고 러시아대통령의 방일을 추진하며 북방영토 반환 문제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취임 직후인 1998년 8월31일 북한이 동해에서 대포동미사일 발사실험을 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 전역미사일방어(TMD)체제 공동연구개발에 합의하는 등 군사력 증강을 추진해 주변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오부치총리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장 주력했던 것은 7월 중순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주요선진국(G8) 정상회담. 이 회담을 앞두고 아시아지역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아시아 4개국을 순방하는 등 의욕을 보였었다.
<도쿄〓이영이특파원>yes20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