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극복 지도자/덩 샤오핑]文革폐허서 12億인민 구출

  • 입력 1997년 12월 1일 20시 03분


78년 11월 19일. 유난히 추운 겨울밤 베이징(北京)중심부인 시단(西單)근처에 벽보가 나붙었다. 「대자보」가 아니라 「소자보」였다. 이 소자보는 마오쩌둥(毛澤東)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한달뒤.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는 부총리이던 덩샤오핑(鄧小平)을 직책없는 최고지도자로 선출했다. 세차례나 권력에서 실각한 뒤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을 얻으며 화려하게 복권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백53달러로 세계 1백3위. 혁명과 반혁명, 우파와 좌파 등으로 분열돼 모함과 보복이 활개를 친 문화혁명의 폐해가 중국을 뒤덮고 있었다. 정신적 구심점도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덩은 이 역사적 회의에서 『중국경제가 비상하기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의 양 날개를 필요로 한다』고 천명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경제개발을 추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로 2천만명이 굶어죽은 충격이 그 바탕이었다. 덩샤오핑시대는 이처럼 폐허위에서 시작됐다. 덩은 『사상해방 두뇌활용 실사구시(實事求是) 일치단결로 앞을 바라보자』는 요지의 연설을 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문화혁명시기 4인방에 의해 억울하게 탄압당한 사람들을 복권시키는 등 정치적 혼란상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다. 덩의 개혁개방정책은 중국인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문화혁명의 질곡을 경험한 인민들은 덩이 제시한 방향을 역사의 대세로 받아들였다. 한편으로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실험에 불안해했다.특히 80년대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갔다. 이때 덩은 『외국과 합작하더라도 절반은 사회주의다. 전족을 한 여자처럼 아장아장 걸어서는 안된다』며 인민들을 독려했다. 덩은 또 『중국이 망하지만 않는다면 지구상에는 5분의 1의 인구가 사회주의를 견지하는 셈』이라는 논리로 개방정책을 밀어붙였다. 권력의 세계에서 세번이나 실각하고 살아난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덩의 바탕은 능력이었다. 원칙주의자였고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마오는 덩을 실각시켰다가 73년12월 복권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두마디만 충고하겠다. 부드러움속에 강함이 있다. 솜안에 바늘을 감춰라』 그러면서 소집한 공산당 정치국원과 군사령관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덩을 무서워하고 있지만 덩은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한다』고 추켜세웠다. 오죽했으면 마오는 덩에게 『자네라면 안심이네』라며 중국의 후일을 맡겼을까. 온갖 정치적 박해를 당하면서 덩샤오핑이 지킨 원칙은 「사실로부터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의 사상. 덩에게 수정주의자 주자파(走資派)의 혐의를 씌웠던 이 철학은 마침내 70년대말 빛을 보게 된다. 개혁초기 그는 인민들에게 『서기 2000년의 국민총생산(GNP)을 81년의 4배로 끌어올리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농민들에겐 생산한 농작물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각 분야에 개인경영방식을 과감히 도입했다. 덩이 제시한 약속은 95년에 앞당겨 달성됐다. 이제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소강(小康·배부르고 따뜻한 단계를 지나 부유해지기 전단계)」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개혁개방에 성공한 덩은 그러나 경제와 사회주의 유지라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남겼다. 89년 6월 톈안문(天安門)에서 민주화요구 시위가 발생하자 덩은 『사회주의를 타도하여 완전히 서방화된 소위 공화국을 건립하려는 것』이라고 규정, 무력진압을 강행했다. 마오가 지적했던 침이 솜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사회적 부작용도 난제로 등장했다. 특히 소수의 부자를 육성한 뒤 모두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린다는 선부론(先富論)은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개방에 따른 민주화 요구도 과제로 남았다. 그는 사라졌으나 그의 역사적 실험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베이징〓황의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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