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니뮈스 보스의 ‘그리스도의 체포’(1515년경) 샌디에이고 미술관 제공 ⓒThe San Diego Museum of Art
히로니뮈스 보스(1450~1516)하면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된 ‘환락의 땅’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텍스타일 산업이 발달했던 플랑드르 지역은 루벤스를 비롯해 뛰어난 감각의 예술가를 다수 배출했는데, 그 중 한 명인 보스가 그린 세 폭 제단화가 ‘환락의 땅’이다.
높이가 220cm이며 문을 열면 폭 4m가 넘는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의 쾌락과 타락을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한 모습들이 가득하다. 나체의 사람들이 자기 몸보다 큰 과일에 달라붙어 그것을 먹고 있거나, 타락한 인간이 새의 머리를 한 괴물에게 잡아 먹히는 장면 등 기괴한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해 프라도미술관에서 늘 관객이 붐비는 작품 중 하나다.
보스가 그린 것으로 확인된 작품은 전 세계에 25점뿐이다. 15,16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조수들과 함께 많은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이후 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 성당에 있던 조각, 제단화가 대거 파괴되었는데 이 때 보스의 그림도 함께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보스가 그림에 서명이나 날짜를 남기지 않아 그의 작품으로 확실히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서울 세종미술관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전에서 전시하고 있는 샌디에이고 미술관 소장품 ‘그리스도의 체포’에는 보스의 서명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있는 단검에서 보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예수가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왼쪽 화려한 복장을 한 로마 병사가 단검을 꺼내 들고 있으며, 이를 본 베드로가 단검을 들어 저항하려 하고 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그의 바로 옆에서 곁눈질을 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다.
예수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예수만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예수의 바로 옆 촛불이 활활 타오르며 얼굴에 따스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배신을 당하고 체포되는 고통보다, 유다를 용서하고 초연한 감정을 대조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멀리서 전 세계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넓은 시야에서 그린 ‘환락의 땅’과 비교하면, 인물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로 가져와 그린 이 작품은 보스의 감정 표현을 좀 더 디테일하게 감상할 수 있다.
보스가 그린 것으로 확실히 확인되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작품인 이 그림은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다. 또한 약 500년 전에 그려진 작품으로 유럽으로 직접 가지 않으면 보기 힘든 근대 이전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눈 여겨 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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