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 권상우의 ‘아픔’ 장혁의 ‘평범’에 공감 안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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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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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의뢰인’과 ‘컨테이젼’을 보지 않은 분들은 이 영화를 관람한 뒤 읽으면 이 글을 더욱 즐기실 수 있습니다.

‘통증’에서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남자 남순 역으로 열연한 권상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통증’에서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남자 남순 역으로 열연한 권상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곽경택 감독의 영화 ‘통증’에서 배우 권상우는 ‘말죽거리 잔혹사’(2004년) 이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역시 그는 거대한 그 무엇에 말없이 저항하다 결국엔 제 영혼을 활활 불태워 없애버리는 연기에 일가견이 있다. 마치 제임스 딘이 그랬듯 ‘내일이 없을 것처럼’ 오로지 운명적 사랑을 향해 돌진하는 동물적 애처로움을, 그는 놀라운 집중력과 응집력을 통해 그려낸다. 이처럼 매력적이고 잘생긴 배우가 그토록 패턴화하지 않은 연기를 구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통증’ 속 권상우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권상우의 이런 예술적 내면과는 다소 온도차가 있는 것 같다. 권상우가 아무리 자신을 불살라도 적잖은 관객은 ‘호감이 가지 않는’ 그의 현실 속 이미지를 떠올리는 탓에, 어떤 육체적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영화 속 비극 인물 ‘남순’으로 그를 상상하고 몰입하는 데 일정한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의 ‘혀 짧은 발음’과 사회적 물의를 빚은 몇몇 사건, 그리고 여러 인터뷰에서 행한 경솔한 발언 때문에 대중의 마음속에 그가 심어놓은 배우로서의 아우라가 어느새 좀먹어들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29일 개봉하는 ‘의뢰인’도 배우가 힘겹게 쌓아올린 이미지가 때론 영화에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법정드라마의 옷을 입은 이 범죄 스릴러는 기대 이상으로 촘촘하고 밀도 높고 속도감 있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놀라운’ 몇 회의 반전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그 반전이 제작사가 희망하고 원한 것만큼 놀라운 수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이유는, ‘변호사 하정우, 검사 박희순, 용의자 장혁’이라는 주연급 캐스팅만으로도 관객은 영화가 숨기고 있을 장르적 반전의 정체를 어느 정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장혁이라는 걸출한 성격파 배우가 한낱 평평한 캐릭터를 지닌 선의의 피해자 역할이나 하려고 이 영화에 출연하진 않았으리라고 지레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개봉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신작 ‘컨테이젼’은 신선한 충격을 선물한다. 신종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퍼지면서 지구가 재앙을 맞는다는 내용의 이 영화 첫 장면은 막 헤어진 애인과 공항에서 통화를 하는 한 불륜 유부녀의 얼굴로 시작하는데, 연신 기침을 해대며 벌겋게 뜬 얼굴을 한 이 여성이 바로 할리우드 최고의 지성적 풍모를 자랑하는 여배우 귀네스 팰트로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주연인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영화 시작 딱 8분 만에 간질 환자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고 게거품을 입에서 쏟아내며 흉물스러운 얼굴로 죽어버린다는 것! 이후 부검대에 오른 그녀의 두개골이 전기톱으로 갈리고 머리껍질이 벗겨지는 끔찍한 모습은 ‘누구라도 느닷없이 죽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피부로 전달하려는 배우와 감독의 용감한 유희가 아닐 수 없다. 예쁘고 지적이며 만날 에비앙 생수로 발 씻을 것만 같은 톱 여배우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것도 완전히 ‘비호감’ 몰골로 죽어가는 캐릭터를 자처하는 것은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진정한 모험가가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의 허물을 지적하는 일은 누구나 즐겁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흉을 보며 스스로에게 짓궂게 굴 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이가 바로 진짜 예술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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