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권재현]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랜 토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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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6일 15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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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에서 희생에 대한 2가지 시각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했던 왕년의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했던 왕년의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희생이란 단어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대조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물을 뜻합니다. 눈처럼 흰 순백의 염소나 양을 죽여서 제단에 올리는 희생제의를 말할 때 그 희생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에는 그런 종교적 제의가 숨어있습니다.

둘째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희생은 바로 이 두 번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조금 비약해 표현한다면 첫째 희생이 타살이라면 둘째 희생은 자살입니다. 전자가 나를 위해 타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의 다른 말이라면 후자는 타자를 위해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곰곰이 뜯어보기 위해선 고대 희생제의의 출발은 가축이 아니라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문화인류학의 연구결과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생에 깃들인 살인의 추억

남미 잉카제국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도 위기가 발생하면 공동체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그 구성원 중 한 명에게 모든 죄를 전가한 뒤 죽여서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인간속죄양을 뜻하는 파르마코스(pharmakos)입니다. 심청전과 같은 동양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처녀공양의 풍습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인간이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인간속죄양을 대신할 대체물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희생이란 단어엔 '살인의 추억'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핏빛 가득한 단어는 그 시초부터 성스러움과 결부돼있습니다. 그 폭력의 희생양이 바로 숭고한 신에게 바쳐질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성스러움의 이런 기이한 동거현상을 제일 먼저 간파했던 인물이 '황금가지'를 쓴 신화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라면 그 메커니즘과 기원을 규명한 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쓴 르네 지라르입니다.

프레이저는 고대사회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어 모시던 왕이 늙으면 그를 죽이고 새로 젊은 왕을 옹립하는 풍습을 발견하고 이를 '신성한 왕의 살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왕의 죽음은 곧 신의 죽음이고 신의 죽음은 세상의 종말을 뜻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노쇠한 왕을 희생시키고 젊고 건강한 왕으로 대체한다고 봤습니다.
일견 성스러운 희생에는 인간의 폭력이 숨어있다.
일견 성스러운 희생에는 인간의 폭력이 숨어있다.

지라르는 이런 인간속죄양 풍습이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최초의 살인'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인간집단 내부의 갈등이 팽배해져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란 홉스적 상황이 도래했을 때 그 집단 구성원 중 누군가가 우발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경악과 침묵 뒤에 문득 평화가 깃듭니다.

그 평화는 집단폭력에 희생된 이가 준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에 죄의식이 결부돼 최초의 희생자에 대한 신격화(신화화)가 이뤄집니다. 다시 홉스적 상황이 다시 도래했을 때 사람들은 다시 평화를 되찾으려 옛 일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최초의 희생양을 대신할 누군가(상징화)를 찾아 내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최초의 살인이 인류문화의 기원을 형성하는 '초석(礎石)적 살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영화 ‘그랜 토리노’가 그려낸 폭력과 희생의 역설

그렇다면 타의에 의한 희생이 자발적 희생으로 의미의 전회(轉回)가 이뤄진 것은 언제일까요. 지라르는 그 시점이 언제라고 못 박지는 못합니다. 다만 예수가 그의 의미의 전회를 완성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신화가 만장일치에 가까운 폭력에 살해된 희생양의 진실을 은폐, 미화하는 반면 오로지 성경의 신화만이 억울한 희생양의 편에 서서 희생양 메커니즘의 야만성과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신화가 수많은 희생양 문화의 하나로 보이지만 정반대로 예수야말로 그 희생양 문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양이 돼 죽어갔다는 역설적 통찰이 담겼습니다.

세계 모든 신화와 기독교를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파악해 기독교를 특권화한 지라르의 이런 시각은 기독교를 비판해온 서구 지성은 물론이고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논란을 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비판 중에서 인류역사에서 기독교가 집단폭력에 희생되는 희생양의 편에 서려한 종교였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사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희생의 두 가지 의미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사례로서 십자가로 상징되는 예수신화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 후반부에 기독교적 희생을 실천한 감독.
인생 후반부에 기독교적 희생을 실천한 감독.

계몽주의 이후 유럽지성사가 기독교 비판을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지라르의 이런 친기독교관이 거북함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신화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화를 거짓과 불의의 산물로 비판하는 독선에 대해선 별도의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은 기독교 문명을 토대로 한 서구중심주의를 다시 부추길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정신의 역사는 첫 번째 의미의 희생에서 두 번째 의미의 희생으로 이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지라르의 통찰은 분명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희생에 숨어있는 이런 역설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영화가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그랜 토리노'입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칠순노인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꼰대'의 전형입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평생을 보낸 그는 미국자동차만 타고, 외국인을 혐오하며, 맥주를 마시면서 친구들과 세상을 씹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자기 눈에 거슬리는 꼴은 죽어도 못 보기에 두 아들은 물론 손자손녀하고도 사이가 나쁩니다.

1972년산 '그랜 토리노' 자동차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혼자 사는 그의 옆집에 중국소수민족 이민자 가족이 이사 옵니다. 그들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감추지 않던 월트는 그 집의 아들 타오가 십대 갱스터들의 협박을 못 이겨 그랜 토리노를 훔치러 차고에 침입하자 총을 꺼내듭니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타오의 가족과 친해진 월터는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타오와 그 누나 수를 말없이 돌보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타오와 수가 같은 소수민족 갱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 월터는 왕년의 솜씨를 발휘해 남매를 괴롭히는 갱 두목을 혼내줍니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부르는 법. 갱들은 타오의 집에 총기를 난사하고 수를 만신창이로 폭행합니다. 월터는 분노합니다. 하지만 그 분노는 갱단을 향한 것뿐 아니라 그런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들인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남매를 위한 희생을 선택합니다.

왕년의 이스트우드라면 여기서 희생이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갱단 전체와 전쟁을 벌이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랜 토리노'의 이스트우드는 '손가락 총'만 들고 갱단의 소굴로 들어가 폭력을 종식시킵니다. 그것은 철저히 기독교적 희생입니다.

희생의 두 의미가 교차하는 십자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그랜 토리노’ 포스터.
영화 ‘그랜 토리노’ 포스터.

이 영화가 더욱 감동적인 것은 그 희생의 주인공이 바로 70년대 액션영화의 대명사였던 '더티 해리' 시리즈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점입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할 자'가 서부극 총잡이로서 자신에 대한 고해성사였다면 '그랜 토리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의 화신이었던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영화사에서 배우 이스트우드야말로 십자가와 같은 존재입니다. 타자를 파괴하는 폭력적 희생과 자신을 파괴하는 자기소멸적 희생이 교차하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지라르가 말한 '첫 번째 의미의 희생에서 두 번째 의미의 희생으로의 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영화배우인 것입니다.

사실 만년의 이스트우드는 지라르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항상 교회 주변을 서성입니다.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가 그러하고 '그랜 토리노'의 월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목사나 신부의 설교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항상 딴죽을 겁니다. "니가 인생에 대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뭘 아는데"라는 식이죠. 결국 교회는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실천합니다. 그의 주인공들은 목사나 신부보다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지만 그들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더 잘 실천합니다. 백인 중심의 편견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도 닮았고 이 때문에 늘 '공정한 영화'를 기대하는 삐딱이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것도 닮았습니다.

솔직히 '그랜 토리노'를 보고난 뒤에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과연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화미학의 정점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랜 토리노'에서 짓궂게 손가락 권총을 만들어 겨누던 그가 이 말을 들으면 씩 웃으면서 그 유명한 대사 'Make my day!'를 던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이 풋내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직도 난 전성기라고. 누가 맞는지 오늘 날 한번 잡아볼까?"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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