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HD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원청을 상대로 제기한 단체교섭 청구 소송에서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이른바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개정 노동조합법 시행 전 사건에는 기존 판례에 따라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돼야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로 볼 수 있다는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가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낸 단체교섭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하청노조의 상고를 기각했다. 원심과 같이 HD현대중공업이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번 사건은 원청이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상대방이 될 수 있는지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정면으로 다룬 사건이라는 점에서 산업계와 노동계의 관심을 받아왔다. 특히 올해 3월 개정 노동조합법 2·3조가 시행된 뒤 원청을 상대로 한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어서, 향후 원·하청 교섭 질서에 미칠 파장도 주목됐다.
다만 대법원은 이번 사건이 노란봉투법 시행 전 제기된 소송인 만큼 개정 전 노동조합법을 기준으로 판단했다. 대법관 13명 중 9명은 구 노동조합법 2조가 적용되는 사안에서는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에 관한 기존 법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다수의견을 냈다.
대법, 과거 판례 유지… “적극적 교섭 의무 인정 신중해야”
대법원은 1986년 판례에서 제시한 원청 사용자성 판단 기준을 다시 확인했다. 원청이 단체교섭 의무를 지는 사용자인지를 판단하려면 근로자를 지휘·감독하면서 근로를 제공받고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아울러 원청이 하청노조에 대해 노조 활동에 지배·개입하지 않을 의무 등 소극적 의무를 부담하는 것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단체교섭에 응해야 하는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고 봤다. 원청에 단체교섭 의무까지 인정하는 해석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다.
이번 사건은 2016년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가 HD현대중공업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하청노조는 원청이 하청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하는 지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작업 지시와 현장 운영, 안전보건 환경 등이 원청 사업장 안에서 원청의 영향 아래 이뤄지는 만큼 단체교섭 상대방이 돼야 한다는 취지였다.
HD현대중공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하청 노동자들과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한 사용자가 아니고, 하청업체가 독립적으로 임금과 인사 등을 결정하고 있어 원청에 단체교섭 의무를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하청노조는 2017년 1월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단체교섭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HD현대중공업의 손을 들어줬다. 하급심은 하청업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임금과 인사 등 핵심 근로조건도 하청업체가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만큼 원청을 직접 사용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건은 2018년 12월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은 장기간 심리 끝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항소심 이후 약 7년 6개월 만에 나온 판단이다.
이번 판결은 원청의 교섭 의무 확대 여부를 둘러싼 산업계의 우려 속에서 나왔다. 조선업은 사내하청 비중이 큰 대표적 산업으로 꼽힌다. 만약 대법원이 구법 아래에서도 원청의 교섭 의무를 인정했다면 조선업뿐 아니라 건설, 철강, 물류, 제조업 등 하청 구조가 많은 산업 전반에서 원청 상대 교섭 요구가 확산될 수 있었다.
대법원이 구법상 기존 판례를 유지하면서 산업계는 일단 부담을 덜게 됐다. 구 노동조합법이 적용되는 사건에서는 원청과 하청 노동자 사이에 명시적 또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한 원청의 단체교섭 의무를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는 법리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판결이 노란봉투법 이후 사건의 결론까지 확정한 것은 아니다. 올해 3월 시행된 개정 노동조합법은 사용자의 범위를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개정법 시행 이후 제기된 원청 상대 교섭 요구 사건에서는 별도의 판단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대법관 4명이 반대의견을 낸 점도 향후 쟁점으로 남았다. 이들은 원청이 근로조건에 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수급근로자의 노조에 대해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한다고 봐야 한다면서 종전 판례를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반대의견은 개정 노동조합법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가 향후 사건에서 주요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는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어느 정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했는지가 개별 사건별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이번 판결은 구법 사건의 판단 기준을 확인한 의미가 크다. 다만 개정 노동조합법 시행 이후 원청 사용자성 판단 기준은 달라진 만큼, 원·하청 교섭 질서를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향후 성실하게 교섭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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