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00원 넘게 치솟으면서 한국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은 더욱 짙어졌다. ‘고환율→수입물가 상승→소비자물가 상승→금리 인상→경기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 속에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S) 공포’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원화 뿐 아니라 다른 국가 통화도 함께 약세를 보이고, 외화유동성이 과거 위기에 비해 풍부하기 때문에 대형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4월부터 지난달까지 5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한국보다 높은 미국 금리를 좇아 해외 자본이 한국을 탈출하기 시작하면 예상치 못한 경제 충격이 찾아올 수도 있다.
● 경제위기급 환율…“연말 1500원 간다”
2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98.0원에 거래를 시작한 직후 곧바로 1400원 선을 돌파해 1413.4원까지 치솟았다.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건 1997~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역대 두 차례였다. 환율 수준만 놓고 보면 경제위기 때와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국은행이 다음 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만 올리면 원-달러 환율은 1434.2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예측했다.
무역수지 등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 악화가 원화 가치 하락을 더 부추기고 있다도 분석도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한미 금리 차가 벌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무역수지와 재정건전성 악화로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고 있다”며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을 비롯해 대외 부분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원-달러 환율은 연말 1500원을 돌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국내 산업계도 고환율 비상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국내 산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일부 기업들이 이미 투자 계획 재검토에 들어간 가운데 달러 부채 확대와 원자재 가격 상승, 해외 투자비 상승 부담이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류비와 항공기 리스 비용 등을 달러로 지급하는 항공사들은 환율 상승의 직격타를 받는다.
원재료 수입 비중이 큰 철강업계와 원자재를 사들여 중간 가공을 거쳐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제조업계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포스코홀딩스와 동국제강 등 국내 주요 철강 기업들의 3분기(7~9월) 영업이익이 지난해 대비 절반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해외 투자에 나선 기업들에게도 고환율은 악몽이 됐다. 연초 주요 대기업들이 해외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1200원 수준이던 환율이 1400원으로 뛰면서 투자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었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주에 착공 예정이던 원통형 배터리 단독 공장 계획을 재검토 중이다. SK하이닉스도 청주 M17 신공장 착공을 잠정 보류했다. 류성원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정책팀장은 “정부가 적극적인 환율 안정화 대책을 실행하는 한편 규제개혁, 세제지원 등 경영환경 개선에 힘써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정부 “가용한 모든 수단 동원할 것”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주재한 뒤 기자들과 만나 “일방적인 쏠림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간다는 방침”이라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필요한 순간에는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견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외에는 환율에 대응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이준행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율 방어를 위해 우선 순위로 금리를 올려야 한다”면서도 “그 경우 부동산 자산가치 급락과 함께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로 경제에 주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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